[Opinion] 요요의 시간 [도서/문학]

<가짜 팔로 하는 포옹>(김중혁, 2015)
글 입력 2021.08.2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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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세계의 전부인 시절이 있다.

 

세계 시계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왜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지, 날짜변경선을 넘어가면 왜 하루가 앞으로 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지구가 자전을 어쩌고, 자오선을 기준으로 어쩌고 해서 시차가 생긴다는 과학적 사실을 배운 것과 별개로 깨달은 게 있다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시간이 존재하며, 나의 삶은 타인을 내 시간 속에 잡아넣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중혁의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 수록된 단편 <요요>에는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한, 나아가 존재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력과 성찰이 담겨 있다. 소설가 이기호의 말처럼, 그의 글은 이과 계열의 문제를 문과 계열의 수식과 비유로 함께 가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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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불완전한 세계로 내던져진다. 그렇기에 불완전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찾거나, 존재의 불완전함을 채우고자 이런저런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이는 보통 부모의 보살핌이나 교육, 혹은 또래 집단과의 교류를 통해 이뤄지지만, 어린 시절부터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던 차선재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관계를 부수고 고리를 끊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외부 세계와 자신을 단절시키고, 대신 외삼촌이 선물로 사 준 기계식 손목시계와 애착을 형성하며 세계의 시간적 질서를 동경했다.


기계식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던 그는 시간의 질서를 파악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가 바로잡고 싶었던 것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려는 정도의 방어 기제로 가려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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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나면서 변한다. 견고했던 차선재의 세계에 불쑥 들어와 그를 흔들어 놓은 것은 대학 동기 장수영이었다. 그녀는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들고 처음 등장하는데, 비디오카메라가 공간을 포착하여 시간성을 부여하는 장치임을 생각하면 이는 그녀가 차선재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인물임을 의미하는 장치다.


둘은 대학에서 특강을 함께 듣다가 시간을 효율성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강연자를 비웃으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차선재는 장수영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자신과 그녀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친해지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아픔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를 보호하는 동시에 가두고 있었던 그의 세계가 확장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둘의 인식은 앞서 말했듯 그 출발점이 다르다. 비유하자면 그들은 교차로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둘의 차이는 그들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연하지, 지구는 말야, 커다란 시소처럼 생겼을 거야. 하느님은 시소 중간에 앉아 군형을 맞추고 계실 거 같아. 좋은 사람 한 명이 생겨나면 반대편에 나쁜 사람 한 명을 만들고, 좋은 일 하나가 생기면 반대편에다 나쁜 일 하나를 만드실 것 같아."

 

"난 세상이 그렇게 단순할 거 같진 않아. 시계를 분해하다 보면 작은 나사나 헤어스프링 하나만 사라져도 모든 게 엉망이 돼버려. 시간도 전혀 맞질 않고... 시계도 그렇게 복잡한데, 세상이 시계보다 간단하겠어?"

 

 

시소의 근본은 흔들림이다. 시소는 균형을 지향하지만, 끝내 균형에는 이르지 못한다. 세계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장수영과 세계의 완전함을 전제로 그 질서를 파악하려 했던 차선재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차선재는 장수영을 좋아했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상처를 피하려는 습관 탓에 결국 그녀를 잡지 못한다.

 

그는 그녀가 보낸 편지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로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읽혔고, 어떤 날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읽혔고, 어떤 날은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처럼 읽히는 편지는 텍스트의 불변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미가 바뀌었다. 그는 어떤 것이든 인간의 인식 하에서 그 의미가 바뀔 수 있음을,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느끼고 자신만의 시계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가 제작한 첫 번째 시계 ‘시간은 흐른다’에는 자신이 동경하던 완전함이란 어쩌면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계도 불완전한 인간의 인식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식하는 흐름, 즉 과거-현재-미래로 작용하는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담아낸 시계는 그의 삶과 경험을 녹여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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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재의 차기작이 될 뻔했던 ‘Station’은 작중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Station’이 그 자체로 가지는 의미와 'Station'이 미완성으로 남겨진 것이 갖는 의미다.

 

'시간은 흐른다'로 화려하게 데뷔한 후 작은 슬럼프에 빠진 차선재는 오랜만에 장수영의 메일을 받는다. 베를린에서 지내고 있는 장수영이 함께 보낸 영상들은 모두 불완전한 세계에 대해, 특히 공간이 시간과 맺는 관계와 그 의미에 대해 그녀 나름대로 답을 내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가는데 기차만 뒤로 달리는 영상 ‘Station’을 본 차선재는 기차가 시간을 거슬러가고 싶은 사람들을 그곳에 데려다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직선적인 시간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시계, 즉 인간이 직선적인 시간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설계한 시계 ‘Station’은 그렇게 세상에 나올 뻔했다.

 

시계를 완성해 가던 차선재는 장수영과 베를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베를린에 갈 수 없게 되었고, 장수영과의 연락도 끊기고 만다. 이번에 관계를 부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단지 외부의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방향을 잃은 분노만이 남았다.

 

인간의 인식 아래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외부 세계의 불가항력으로 인해 방향을 잃었다. 그는 '결과를 되짚어 선택을 선택할 수는 없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인식하고, 미완성이었던 ‘Station’을 유리관째로 자신의 서랍 속에 넣어버린다. 그렇게 ‘Station’은 시간을 부여받지 못한 채 멈춰 있게 되었다. 차선재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Station'에 시간을 불어넣는 순간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붙잡지 못한 순간, 가닿지 못한 순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자꾸만 상기하게 될 것 같았다."

 


 

요요



시간이 흘러 차선재의 작품번호가 30번에 이를 때쯤,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자신이 디자인한 시계들로 전시회를 열게 된 차선재는 자신의 전시회에 온 장수영을 만난다. 이번에도 장수영을 잡지 못한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를 생각했다. 높이 쌓아올린 책 더미에서 밑바닥의 책을 꺼내기 힘들 듯, 오래 전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미완의 작품 ‘Station’을 서랍에서 다시 꺼내 보며 언제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그녀의 편지에 쓰여 있던 말을 떠올렸다.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그는 이어서 자기 인생의 새벽 3시를 생각한다. 시계는 늘 반복해서 90도의 각을 만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에게 늘 다른 시간이었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고, 평생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시간은 그에게 요요와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신의 불완전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 이를테면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나 공간에 의지해 자신을 타자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완서의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민주화의 어지러운 불길 속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은하계, 즉 무의미한 공간의 광활함을 되뇌이며 잊으려 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아들의 부재를 느끼게 된 순간, 그녀의 결심은 무너지고 만다.

 

 

“나는 황급히 은하계 주문을 외려고 했죠. 소용이 없었어요. 은하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저는 드디어 울음이 복받치는 대로 저를 내맡겼죠. 제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참고 있었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큰 울음이었으니까요. 제 막혔던 울음이 터지자 그까짓 은하계쯤 검부락지처럼 떠내려가더라구요. 은하계가 무한대건 검부락지건 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일이지,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

 

 

<요요>의 차선재는 자신의 불완전함에서 벗어나고자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을 동경했다. 오랫동안 그는 완전한 시간의 질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 와서야 시간이란 것도 결국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은 자신의 몫임을 깨닫는다.

 

결국 <요요>의 핵심은 '존재와 세계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그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아닐까. '일그러진 흑백의 그림자를 되짚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완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려볼 수는 있었다.'는 차선재의 말은 자신을 둘러싼 과거의 모든 인과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어도, 생각을 통해 그 일부를 엿볼 수 있다는 뜻이리라.

 

프루스트의 말처럼 과거는 아무에게나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과거는 오직 자기 초월적인 정신의 노력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이 현재와 맺는 관계를 알려 준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은 오로지 인간에 의해 이뤄진다. 직선으로 뻗어가는 요요가 되돌아오게 하는 힘, 그것은 결국 인간의 힘이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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