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선의 여성 선구자, 나혜석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8.0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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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란 누구인가


  

나혜석은 화가뿐만 아니라 근대법, 문학, 민족운동에도 두루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로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그 시대의 선각자란 곧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는 여성으로 태어나 활발한 바깥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나혜석은 일생을 투쟁으로 살았다. 오늘은 그러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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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소실된 그림들을 선보이고 있는 나혜석의 모습

 

 

나혜석은 오 남매 중 둘째로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위 조선의 양반인 상류 가정에서 출생해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여성으로는 이례적으로 일본 유학을 했으며, 동경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하게 된다. 이렇듯 부유한 환경에 유학까지 한 안정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앞서간 시대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남편 최린을 제소한 내용을 담은 “이혼 고백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피고의 흥분에 끌려 수십 회 정조의 희생이 되었고 일생에 막대한 손해를 받았으니 위자료 12,000원을 청구한다.’라는 내용의 “이혼 고백서”는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충격적인 발표였다.

  

또, 나혜석은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이 잘 드러난 소설 “경희”, “희생한 손녀에게” 등을 발표하였고, 신문에 여성의 신체적 자유를 고려하지 않은 조선 부인 의복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개량에 대한 의견을 게재하는 등 다분히 신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나혜석의 미술 세계


   

다만 나혜석의 미술 세계에 대해 논하자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가 생전 “조선미술전람회”와 같은 당시의 미술 전람회에 낸 출품작이 18점이며, 이를 포함한 약 3백 점의 작품을 남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은 작품은 채 50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씩 남은 작품마저도 개인 소장이라 대중이 접할 수 없거나, 어떤 것들은 위작의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최근 故 이건희 회장이 남긴 “화녕전 작약”이 기사로 전해져 이를 보고자 하는 관객의 발걸음이 활발하지만, 여전히 현대사회에서는 나혜석의 발자취를 느끼기 어렵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그의 작품을 소개하며 나혜석의 정신을 느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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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모습과 작품 "자화상"

    

 

먼저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1928년에 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의 얼굴은 우뚝한 코, 확신에 찬 눈빛, 전체적으로 두꺼운 골격 등 여성미를 드러내기보다는 어떤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보통 흰 저고리로 표현되던 전통복식이 아니라 어두운색 양장(洋裝)을 차려입은 모습은 그 자체로 나혜석의 강인한 정신이 드러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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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최근에 공개된 “화녕전 작약”이다. 이 작품 역시 나혜석의 대표작 중 하나로, 고향 수원에 있는 정조의 영전을 그린 것이다.

 

나혜석이 수원에 칩거하던 193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정확하다기보다는 큼직큼직하고 감각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그림 안에 바람이 부는 듯 역동적인 느낌은 거친 붓질과 두꺼운 물감층을 올려 완성한 것이다. 나혜석만의 독특한 예술론이 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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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부”이다. “나부”는 지금은 소실된 조선미전 출품작 중 하나로, 당시의 다른 누드화와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그가 허리, 팔, 유방 등의 신체를 두껍고 각이 지게 그렸기 때문이다.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오던 곡선미가 제거되고 간소화된 모습은 당시 아름다움을 강조하던 누드화와는 다르다. 이 작품은 실제로 조선미전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았는데, 당시 나혜석의 이러한 시도가 기성세대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처럼 일생을 내내 투쟁의 연속으로 보낸 나혜석은 1948년 소지품도 없이 무연고자 병동에서 죽었다. 세월이 흘러 그의 투쟁과 작품이 재조명받고 있는 지금, 다수의 위작 논란과 작품의 양적인 한계로 인하여 원활한 탐구가 어려운 점은 마치 나혜석이 일생 이어온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그가 우리 사회에 전하고자 한 평등, 인권 그리고 노력의 메시지는 이렇듯 작품 속에 남아 아직도 마음속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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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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