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생명력, 올림픽과 스포츠

글 입력 2021.08.0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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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팬데믹으로 인해 미뤄졌던 올림픽이 도쿄에서 뒤늦게 개막한 지도 벌써 이주가 지났다. 예상과 달리 경기를 향한 열기가 뜨겁다. 텅 빈 경기장에서 무슨 흥미를 발견할 수 있겠냐고 중얼거렸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한여름. 길거리에서, 치킨집에서, 호프집에서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은 브라운관 앞에서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누르려 애쓴다.

 

극도로 제한된 움직임과 정적으로 변한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갈고 닦은 기량을 펼치는 선수들의 몸짓에 어느 때보다도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쌓아 올린 시간이 그림 같이 튀어 올라 아주 찰나에 흩어진다. 눈물을 글썽이고 또 주먹을 쥐고 환호하면서, 우리는 다시 볼 수 없는 공연을 관람하는 것처럼 매일의 극에 새롭게 몰입한다.

 

우리가 올림픽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것들은 모두 차치하고 올림픽이 지닌 근원적인 예술성에 주목하고 싶다. 하계와 동계를 합쳐 총 380여 개에 달하는 스포츠 종목들은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스포츠는 근육과 뼈를 가장 격렬하고 유려하게, 그러나 결코 공격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한다. 움직임을 제어하는 선수들을 제외한 우리는 그 놀라운 역동성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신체를 목격하게 된다.

 

일반인들의 범주를 넘어선 오랜 시간 다져진 운동선수들만의 기량은 성큼 다가와, 때로는 스피드로,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유연함과 기민한 반사 능력으로 대중들을 매혹시킨다. 경쟁이 선사한 압박감 속에서 극한으로 짜내진 육체적 감각은 선수와 대중, 모두의 정신적 영역, 미학적 영역까지 침투한다. 카타르시스가 터지고 감정이 범람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기술(skill)보다 아름다운 장면(scene)에 몰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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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춤, 1909-10, 캔버스에 유채, 260X391, 에르미타쥬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우리는 본디 어떤 목적하에 몸을 움직인다. 목적이 생존에 있을 때 인간의 행동은 노동이 된다. 그러나 목적이 생존이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유용성의 창출에 있지 않을 때, 노동은 놀이가 된다. 인간은 생존 이외의 다양한 욕구들을 놀이를 통해 주권적으로 표출한다. 놀이는 예술적 능력을 발현하는 통로로서 기능한다. 그렇게 인간은 호모파베르(노동의 인간)에서 호모사피엔스(인식의 인간)로, 그리고 더 나아가 하위징아(J. Huizinga)의 표현처럼 호모루덴스(유희의 인간)로 변모해왔다. 스포츠가 역사적으로 신체적 놀이에서 기원하였으며 인간 표현의 한 형태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은, 스포츠가 충분한 유희적 예술성을 띠는 인간의 신체활동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운동을 통해 생산되는 몸의 활기, 그리고 그 활기가 빚어내는 쾌락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라스코와 알타미라 동굴의 벽에 새겨진, 야성적으로 꿈틀거리는 인간 및 동물 형상을 떠올려보자. 그 강렬한 생동감은 움직이는 형태를 향한 인간의 추적과 미학적 탐구가 원초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태곳적부터 이어진 이 본능은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 「춤」(1909-10)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마티스는 생동하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색채와 유기적인 곡선을 통해 묘사하여 무한한 생명력을 화면에 압축 시켜 놓았다.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색—붉은색, 푸른색, 그리고 녹색은 우주적인 음과 양의 밸런스를 맞추기라도 하는 듯 선명한 조화를 이룬다. 대지를 박차는 뼈와 근육이 그려내는 강렬한 힘, 자유, 그리고 아름다움은 우리를 본능적으로 흥분시킨다. 튀어 오르는 땀과 공이 그려내는 궤적 앞에서 속절없이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행동의 주체가 아닌 관찰자까지도 이 광적인 열기에 도취한다는 것이다. 마티스의 그림 속에는 다섯 명의 누드가 서로 손을 잡고 흥겹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오륜기를 연상시키는 복수의 곡선들이 모여 강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캔버스 밖의 감상자도 그 에너제틱한 리듬에 몸을 맡기게 된다. 움직임은 모두의 아름다운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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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에 참여한 우리나라 선수단

 

 

복수형(複數;plural)의 인간은 육체의 매혹적인 움직임에 규칙을 부여하고 이를 집단적 경쟁 활동으로 발전시켜왔다. 이에 따라 갈등을 조정해 줄 심판이, 전략을 짤 감독이, 지원을 담당할 구단과 매니저가 생겼으며 공식적인 경기가 주관되기 시작했다. 각 집단별로 이름과 상징이 부여되고, 한 집단을 고정적으로 응원하는 팬덤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스포츠라는 집단적 놀이는 그렇게 거대하고 복잡한 문화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치 예술의 장르처럼 작가와 대중(혹은 창작자와 수용자), 즉 선수와 관중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나의 팀, 지역, 더 나아가 단일국가와 대륙까지 방대하게 확장된 이 집단적 놀이의 절정은 바로 올림픽이다. 민족주의와 초국가주의가 뒤섞인 경기장에서 관중들은 이제 근원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열기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타오르는 애국심을 느끼기도 하고 경이로운 움직임에 압도당하기도 한다. 잘 짜인 질서 안의 질서 속에서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관중들은 자신의 국가 혹은 선수를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오랜 시간 동안 건설된 문화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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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무제, 1951, 캔버스에 유채, 236.9X120.7, 텔아비브 미술관, 텔아비브

 

 

올림픽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예술적이다. 우선 예술 장르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을 스포츠 또한 포함하고 있다. 완벽을 위해서는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문학이나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승전결적 흐름, 드라마틱한 서사, 전율이 흐르는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적 리듬과 변칙적인 율동이 몸동작과 캔버스 표면과 나열된 문장들과 오선보 모두에서 관찰된다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는 때때로 합일되어 우리에게 초월적인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이를 총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올림픽이다. 수백 개의 종목과 수천 명의 선수는 자신의 무대를 구축하기 위해 사 년 동안 하나의 플롯을 짠다. 그 플롯의 정점이 금빛으로 물들기를 바라면서. 한 달여 동안 우리는 몇 천개의 이야기를, 교향곡을, 캔버스를,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땀과 눈물을 주식으로 삼아온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거룩하게 귓가에 내려앉는다. 올림픽 속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은 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내적인 부분까지 자극하여 종교심에 가까운 감정을 고취시킨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가운데 찾아오는 기적적인 순간, 정신적인 싸움, 감동적인 화합은 늘 불시에 찾아오고, 우리는 끝내 인간적인 충만함을 느끼며 선수들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로스코의 「무제」(1951)에서 드러난 장엄한 신비함은 관람객의 감정과 정신적 사유를 자극한다. 특정한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오직 선명한 색면이 창조해낸 빛은 우리를 날 것의 세계로 이끈다. 새빨간 희망과 시커먼 좌절이 교차하는 순간, 두려움과 떨림이 불식되고 오직 알 수 없는 숭고함만이 온몸을 채우는 순간을 우리는 안다. 로스코의 거대한 화폭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감정은 경기장 위에서 포효하는 선수들을 볼 때 다시 재생된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생명력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몸을 한껏 떨 수밖에 없다.

 

*

 

인간이 창조해낸 가장 거대하고 집단적인 예술을 감상 중인 올여름, 그 어느 때보다도 올림픽을 향한 관심이 뜨겁다. 메달 여부와 성적에 상관없이 그들이 보여준 분투와 강렬한 생명력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몸 안팎으로 터지는 활기가, 할 수 있다고 되뇌던 선수의 의지가, 끝내 승리를 쟁취해내는 끈기가, 승자의 손을 들어주는 넉넉함이 바다와 브라운관을 넘어 한반도에 아름답게 차기를 바란다. 여름을 장악한 생명력이 남은 2021년을 건강히 뒤덮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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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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