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기운,지운] 만남

1장
글 입력 2021.08.1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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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유독 겨울치고는 날이 따뜻했다. 손대지 않은 음악의 소리가 커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펼쳐 읽고 있던 책은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기에 음악이 귀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그대로 둔 채 책을 읽어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그가 지은을 부르다가 지은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발견하고 그녀의 어깨를 톡톡, 친 것은.

 

지은은 눈앞에서 그렇게도 순수한 색의 금발과 파란 눈, 외국인의 전형적인 묘사로 진부하게 쓰이던 색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지은에게 익숙한 한국어로 말을 걸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한국말 할 줄 아시는구나.’ 라는 안도감이었다.

 

그는 전국을 여행 중이라며 지은에게 이 근처에 하룻밤 잘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지은은 이곳에서 십 년 넘게 자랐지만, 이곳에 여행객들이 머물만한 게스트하우스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을 말해주었을 때 그는 태연하게 사실 자신이 돈이 별로 없다며 실례가 아니라면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게 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초면인 자신에게 잠잘 곳을 청하는 뻔뻔함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실례’라는 단어가 주는 충돌이 좋아서, 지은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지은은 그에게 동네의 작은 카페와 맥도날드를 알려주었다. 그들은 지은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대로 만나기로 했다.

 

지은은 같이 사는 부모님께 평소에 데려오는 친한 친구와 밤에 함께 올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아마 오늘 초면인 외국인을 데려가는 건 (심지어 남자애를) 부모님도 놀랄 일일 테니까. 지은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한 순간과 낯선 사람이 그 순간을 깨어 들어온 순간을 이어 붙여보고, 이 일을 자신과 그만의 비밀로 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그의 생김새를 계속 곱씹어 보느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흘려듣기 일쑤였고,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십 년 동안 대부분의 경우에 평온함을 유지하던 마음이 요동치는걸 지은은 느꼈다. ‘이런 마음은 오랜만이야.’ 곱씹다가 퇴근하고 나서야 그에게 있을 만한 곳을 알려둔 뒤 곧장 와버린 버스를 타느라고 그에게 번호를 받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행히도 지은이 알려준 동네의 유일한 카페에 앉아있었다. 네모난 창 너머로 머그잔을 손에 쥔 그의 모습이 외국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지은의 눈을 마주한 그의 웃음. 외국영화를 보는 것 같네, 지은은 멍하니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는 열한 시가 넘어서야 끝났기 때문에 집은 조용했다. 지은은 그의 신발을 신발장 밑 깊숙이 넣어두고, 최근에 새로 산 신발 하나를 자신의 운동화 옆에 놓아두었다. 치밀하게 부모님을 속이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그에게는 계속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이 상황이 꽤나 객쩍은지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최소한의 언어와 제스처로 지은의 부모님이 큰소리에 깨지 않도록 무사히 씻었다. 지은이 매트리스 위에, 그는 바닥에 누웠다. 그제야 제대로 통성명을 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했다. 외국 이름도 없었다. 내 이름은 최기운이야, 라고 기운이 말했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건넬 수 있는 말은 꽤 많았지만, 지은은 섣불리 꺼내지 않았다. 기운 또한 그런 것 같았다. 각자의 침묵을 곱씹다가 기운이 먼저 말을 건넸다.

 

“지은. 영화 좋아해?”

“응. 우리 영화나 볼까?”

“그래.”

그들은 행여나 그들의 목소리가 안방에 들릴까 봐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었고, 그날 밤 그들이 본 영화는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였다. 지은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잠이 들었고, 기운은 그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기운이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그날 이후라고 했다.

 

지은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했다. 암막 커튼을 치고 잔 터라 지금이 한낮이라는 걸 알려준 건 창틈 사이로 들어온 강한 햇빛이었다. 기운은 고르게 숨을 쉬며 자고 있었는데, 지은은 그의 샛노란 머리카락 색깔이 어둠에 묻힌 것이 아쉬웠다. 언뜻 보니 자신의 밝은 갈색의 머리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지은은 자는 그의 몸을 피해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가 양치를 하고 거실에서 TV를 봤다. 기운은 한두 시간이 더 지나고 배고파서 깨어났다. 지은은 요리를 할 줄 몰라서 뭐 시켜줄까? 라고 물었는데, 그는 재워준 대가로 밥을 해 주겠다고 했다.

“냉장고 좀 열어도 돼?”

“응. 근데 냉장고에 뭐 있는지 나 모르는데….”

“괜찮아. 나만 믿어.”

지은은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녀의 집 냉장고 앞에서 멀대같은 키를 가진 외국인(의 외양을 가진) 남자애가 나만 믿으라고 말하는 그 장면을.

기운은 김치와 굴소스를 꺼내고 밥솥 안의 밥을 보더니 금세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냈다. 평소에 김치볶음밥을 잘 먹지 않는 지은은 그날만은 맛있게 먹었고, 이후로도 그의 김치볶음밥은 종종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재워줘서 고마워, 지은.”

“아냐, 즐거운 여행되길 바라. 안녕”

 

*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서울에서였다. 지은은 서울에서 면접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기운에게 연락을 했다. 하룻밤만 재워줘. 그에겐 금방 답장이 왔다. ‘좋아.’라는 답 뒤엔 자신이 사는 곳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기운은 안 본 일 년 사이 머리카락이 길어져 있었고,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옷 잘 입는 또래의 남자애들처럼 말쑥했다. 말쑥한 차림과 주변 사람들과 다소 다른 외양의 기운이 지은은 조금 낯설었다. 그런 지은의 얼굴에서 낯섦을 읽어낸 기운은 마치 지은을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웰컴. 서울에 온 걸 환영해.”

지은은 근 일 년간 서울에 올라오면서 끊임없이 여기로부터 밀려나고 있다고 느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그 일이 쉽지 않았다. 기운의 말은 마치 행복의 주문처럼 그 순간 지은이 서울에 온 것을 누군가는 환영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기운의 웃음에 지은은 금세 낯섦을 씻어냈다.

기운은 연락을 일찍 줬다면 조금 더 좋았을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왜 그 말을 했는지는 그의 집안을 보고 알았는데, 지은은 말쑥한 옷차림과 거리가 먼 집안 내부에 왠지 웃음이 났다. 기운은 지은을 향해 웃지 말라고 했고 지은은 그럼 이번엔 자신을 재워주는 대가로 집을 치워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영화를 찍은 감독의 다른 작품을 함께 보았다. 지은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고,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기운이 던진 한마디로 지은은 기운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구나, 단정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검은 노트북 화면에는 기운과 지은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화면 속 지은을 바라보며 둘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지은. 근데 이렇게 남자애 집에서 함부로 자면 안 돼.”

“기운아, 너야말로 잘 모르는 여자애 집에서 함부로 자면 안 돼.”

기운은 그러게, 하고 웃었다. 둘은 지은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편의점 앞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으며 중얼거리는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 해 보았다.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지만, 너무나 낯선 그 문장들을 안고 그들은 잠에 들었다.

 

*

 

그들은 그날까지도 그들이 이렇게 함께 오랜 기간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은이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마주한 건 아르바이트가 있어 먼저 나간다는 메모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샌드위치였다. 지은은 그걸 천천히 오랫동안 씹으며 먹고, 부모님께 이제 내려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미니 청소기를 찾아 구석구석 돌리고, 위치를 모르는 물건들을 상 위에 정리해 올려놓고, ‘재워줘서 고마워’라는 메모를 남긴 채 집을 나왔다. 그 집을 나오면서 지은은 어제를 이곳에 놓고 가기로 다짐했다.

 

운이 좋았다, 라고 지은은 그 시절을 기억한다. 지은이 기운의 집에 놓고 가기로 다짐한 하루는 마음속으로 이제 마지막 면접이라고 생각했던 회사에서 면접을 망친 하루였다. 그 회사에서 떨어진다면 당분간은 구직 활동을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지은은 그 마지막 회사에 합격했다. 지은이 서울에 했던 마지막 인사는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

합격은 기쁜 일이었으나 통근이 문제였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는 있었지만, 지은이 취업한 회사는 야근이 잦았다. 마감 시즌이면 지은은 자주 찜질방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지은에게 부모님은 독립을 권했다. 하지만 지은은 부모님이 자신의 독립을 지원해주기 위해 경제적인 부담을 지는 것이 싫었다. 그때 마침 기운과 연락 중이었던 지은은 이 문제를 지나가듯 이야기했고, 기운은 밥 먹으러 갈래? 라는 말투로 나랑 같이 살래? 라고 지은에게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같이 살게 되었다. 지은의 부모님이 그녀의 독립과 함께 귀농을 준비하시는 바람에 지은의 독립은 그녀의 독선과 기운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그들은 각자 회사와 아르바이트 하는 곳의 중간 지점에 꽤 괜찮은 투룸을 구했다. 지은은 화장실이 2개인 집을 원했으나, 그들의 조건 안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이었던 건 기운이 하는 아르바이트가 야간아르바이트여서 삶의 동선이 잘 맞지 않았다는 점 정도. 하지만 이 생활도 기운이 회사에 취직하면서 지은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

 

그들은 맥주와 위스키를 좋아했다. 냉장고에 먹을거리가 비는 한이 있어도 맥주가 비어있는 날은 없었다. 기운은 종종 지은이 잘 모르는 위스키를 들고 왔다. 그들은 거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술을 마시다 잠들곤 했다. 기운은 소파에서, 지은은 바닥에서.

가끔은 술기운을 빌려 하고픈 말을 나누었다. 서로 맞추면 좋을 점들을 둥글게 이야기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맞춰야 하는 일이었다. 그마저도 기운이 가져온 센 위스키를 마신 날에는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눠봤자 다음 날 잊기 일쑤였는데, 그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 비슷해졌기 때문이었고,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은의 친한 친구들은 대체 그녀가 왜 남자애랑 동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평소 이성에게 관심이 없던 지은이 갑자기 낯선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상대가 기운인 것도 한몫했다. 지방에서 살던 지은이 기운과 같은 사람을 대체 어디서 만나서 덜컥 동거를 하게 된 것인지 친구들은 걱정이 많았다. 지은은 친구들이 걱정 어린 말투로 말을 건넬 때마다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 자신의 친구들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보낸 그가 너희만큼 편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어떤 선택과 모험을 위해 일시적으로 맺은 관계라고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지은은 자신의 친구들이 어떤 것을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

기운은 분명 낯선 타인이었다. 하지만 그와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지은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

 

그렇게 그들은 이십 오 년을 함께 했다.

 

“시간이 참 빨라.” 지은이 말하면,

“시간이 빠르지.” 기운이 답했다.

    

 

다음 장, ‘지운’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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