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에필로그. 인간은 예술적인 존재다.

요 미술 관객이 결국 하고 싶던 이야기.
글 입력 2021.08.0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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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예술적인 존재다. 나의 관점으로 질문한 ‘가장 넓은 의미로서의 예술’이 결국 향한 것과 답할 수 있는 건 이런 것이었다. 사람에 대한 것.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쌓아가는 고유의 경험, 그것을 기억하고 해석하고 반추하며 형성되는 그만의 관점, 그 관점이 관조하고 헤아리는 세상. 그러면서도 같은 사람이기에 서로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니고 있는 존재. 꽤 당연하고, 그래서 생각보다 아주 대단하지는 않은 이유들로 인간은 예술적인 존재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다.


아니지, 그 이유들은 우리가 잊고 사는 것과 달리 훨씬 더 중요하고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예술의 정의나 예술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다양할 것이다. 그런 중 나는 이 정의의 내용이, 그리고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결국 우리가 바라는 삶의 방식이나 방향에 대한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질문하게 되었을 뿐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 풍성히 바라보려는 마음을 지니고 그로부터 부단히 의미를 찾아내며, 더 나아가 그것을 표현하고 서로 나누는 순간들로 이어지곤 하는 일상을 떠올리노라면 그렇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예술이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하며, 예술이 생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유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예술 작품 역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연을 품으며 존재한다. 가만 바라보자. 사람도 작품도 보이지 않는 무수한 과정 속에 있는 것들로 비로소 그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존재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누구나 감각할 수 있도록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과 소통이란 것을 하는 것일 테고. 사람도 예술도 쉼 없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쓸모’를 논하는 일이 결국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이유도 비슷하다. 가령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기 이전에, 작품의 가격이 얼마인지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의미를 지님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사람이고 예술이니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다. ‘의미를 부여한다.’ 이 단 하나의 특징만으로 우린 사람과 예술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기에 길고 긴 시간 동안 예술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일 테다.


물론 세상에는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만큼 많은 의견이 있을 것이고, 그런 중엔 정답처럼 혹은 오답처럼 여겨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즉 너무도 다양하기에 우린 그 몇 가지 잣대가 단지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몇 가지 정의만으로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도 말이다. 나는 이런 논리에 위로를 얻곤 하고, 비슷한 이유로 다양한 미술을, 더 정확히는 다른 시각의 이야기를 찾아가곤 한다.


보이지 않는 것. 간단히 형언할 수 없는 것.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 사람 다운 것. 그런 것을 다른 사람도 함께 경험하고 나눌 수 있도록 현현시키는 과정이 오롯이 담긴 것이 예술이다. 저마다의 시각으로 발견하고 주목한 것을 그만의 태도와 언어로 표현하며 공존하는 것. 그러기에 어떻게 보면 예술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모습으로 비로소 다채롭게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너무 낙관적인 예술의 이해인가.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이 말만 봐서는 마치 꿈을 꾸듯 예술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예술은 어느 면에선 꿈을 꿀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치열하고 뼈아픈 목소리가 오가는 곳이기도 하고, 정해진 답이 없는 만큼 다양한 충돌과 오류가 서로 사이에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호기심 어린 감상이 싹 틔우듯 솟아나고 있는 현장이 있다면, 어느 한편에선 미술에 대한 논의를 축적하고자 하는 깊고 전문적인 소통이 생동하고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방식의 초상이 다채로운 만큼, 생동하는 방식과 맞물리는 방식도 그토록 다채로운 것이 예술이다.


그러니까, 예술과 미술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풍경 사이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미술 관객으로 남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쓴 글들을 보면 그렇다. 물론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하고 성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나는 앞으로도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 사이를 어떻게든 부단히 돌아다닐 예정이다. 늘 그랬듯이 자칭 바보 같은 고군분투를 하기도 하며 무엇인가를 기록하려 한다. 일단 그것이 내가 앞으로도 품어가고 싶은 나만의 예술적 삶의 방식, 일상 속 꾸준한 실천이기 때문이다. 나의 예술적 일상과 그것으로부터 조금 더 자리 잡은 나로서의 삶은 그런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따금 괜히 눈에 머무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는 가벼운 순간들도, 길을 헤매다 지쳐 멍하니 주변을 응시하는 순간들도 변주하듯 끼워 놓으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예쁜 쌍무지개가 떴었다. 가만 바라보다 옛날 사람들은 비 온 뒤 쏟아진 햇빛 아래 불쑥 튀어 오른 형형색색의 한 가닥을 얼마나 신비롭게 바라보았을까 상상했다. 잠시 후 SNS 곳곳에서 올라오는 무지개 사진을 보며, 아니 이토록 다른 곳에 있으면서도 같은 것을 마주하고, 그것을 또 다른 장면과 이야기로 공유할 수 있음을 새삼 신기해했다. 내 시각은 이제 이런 것을 예술적 순간이라 번역한다. 이번 연재 끝에 남은 건 그렇게 자리 잡은 나의 시각이다.


어쩌면 또 다른 글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나타날 수 있으니, 기대해 주셔도 좋고 잠시 잊어주셔도 좋을 것 같다. 전자면 기억해 주셨기에 감사하고, 후자면 새로운 느낌과 함께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마다의 고유한 시각으로 살아가는 모두의 예술적 삶을 응원하며, 자신의 시각을 찾아 나섰던 미술 관객의 여정 [관객 노트 Sigak]을 마칩니다.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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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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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미술은 대체 뭘까?”

 

 

인생 첫 미술 글 연재. 열일곱 편의 글을 쓰는 내내 던진 질문이다(마지막 글을 쓰는 지금도). ‘미치겠네’가 핵심이다. 호기심보다는 벽에 부딪치듯이 떨어진 질문이었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쓰다 말고, 때론 쓰기도 전에 잠시 멈춰 고민하는 시간이 잦고 길었다. [관객 노트 Sigak]을 연재하는 동안 이따금 글을 올리지 않아 남겨진 여백에 대해 이런 핑계를 대본다.


미술에 대한 글을 쓴다고 했는데, 미술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했다. 질문의 이유는 비슷하면서도 다양했다. 내 이해가 잘못되었을까 봐 두렵기도 했고, 이런 모습의 미술에 대한 걸 쓰며 동시에 다른 모습의 미술에는 조금도 다가가지 못하는 한계가 선연해서 답답하기도 했다. 미술에 관한 걸 서술하는 여느 글들과 달리 내 것은 퍽 이상하고 제멋대로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예술을 다룬다면 불가피한 일에도 크게 어려워하고 힘들어했다. 그만큼 많은 것을 살펴보고, 나의 태도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여지가 너무도 많은 상태에 있던 시작이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어느 정도 일목요연하고 객관적인 논리를 담은 미술 글을 써야 한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요구를 강박처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속으론 은근히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미술이 무엇인지 찾아가며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저 출처 모를 강박에 깊이 파묻히고 말았다. 이렇게 어긋난 상태에서 이도 저도 아닌 채 쓴 초반 글들은 그 간극 속 괴로움(?)이란 것이 잘 티 난다. 다듬고 살필 겨를이나 명확한 기준 없이 어찌어찌 써서 부푼 상태로 완성이 아닌 수습한 상태로 내보냈으니 말이다.


연재 중간 즈음에 숫자를 매기지 않고 ‘부록’ 혹은 ‘별책’이란 이름을 붙인 글을 몇 편 썼다. 내가 나대로 사사로운 미술 이야기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연재 수에서 제외해 따로 이름 붙인 것이었다. 이 글들을 쓰며 내가 정말 쓰고 싶던 글에 대한 실마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이때가 되어서야 다시 질문할 여지를 가질 수 있었다. “나 정말 무슨 글을 쓰고 싶던 거지?” 질문 이후, 8편부터는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질문에 대한 답과 고민은 두서 없이 많았는데, 간단히 말하면 결국 이런 것이었다. “그냥, 나의 미술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그때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질문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은 대체 뭘까?”는 “내게 미술은 무엇일까?”로 바뀌었고, 두 편으로 나눠야 할 정도로 길어진 12편의 대화는 그 질문에 대해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길고 긴 대답이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가지며 연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는 기분이 자연스레 일었다. “나는 미술을 이렇게 보는 관객이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고, 이제는 그렇게 나타난 나의 시각으로 새로운 맥락 위에서 다른 시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한편으론 이 이후 연재를 이어가는 건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겹치며 12편이 마지막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대화하겠다고 손잡고 데려온 ‘그’에겐 퍽 당황스러운 소식이겠다만, 어쩌겠는가.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 하지만 혹시 모른다. 다음에도 기어코 내 미술 얘긴지 사람 얘긴지 모를 수다를 듣고 있을지도. 나를 반가워하는 것 같진 않지만, 나는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한결같은 그의 무표정을 그렇게 해석하는 편이다.


글 뒤에 있던 글쓴이의 여정은 사실 그런 모습이었다. 이번엔 안 그러고 싶었는데 또 고스란히 글쓴이의 성장 과정(?) 혹은 고군분투(?)를 티 낸 연재가 아니었나 싶다. 다음 연재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또 그럴까 봐 겁난다.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건 기쁜데, 최선을 다해도 그 여지를 드러내게 된다는 건 여전히 부끄럽다. 그런데 한편으론 모두 불가피한 일이란 걸 깨달았으니 조금은 자유롭게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인다. 과연 이 미술 관객은 얼마나 제멋대로가 될까. 혹은 다시 차분해져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차분하고 제멋대로인 도통 알 수 없는 관객이 되어 돌아올지도. 그래,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걸어가려고 할까. 어렵고 즐거운 고민을 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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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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