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팬들의 마음을 담기에 '사랑'은 턱없이 부족한 그릇이다. [도서/문학]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글 입력 2021.07.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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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팬 활동과 늘 함께했다. 누군가가 임무라도 준 듯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대상을 바꿔가며 팬을 자처했고, 나에겐 늘 절대적인 ‘오빠’의 존재가 있었다. 그 속에서 나를 거쳐 간 이들을 향한 감정은 명백한 ‘사랑’이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감기는 눈꺼풀을 치켜뜨며 자정을 기다렸고, 사랑했기 때문에 다음 날 있을 시험을 외면한 채 라이브 방송을 봤고, 사랑했기 때문에 음소거한 휴대폰으로 음원사이트를 24시간 내내 이용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몇만 명의 인파 속에서 발을 밟혀가며 그들을 갈구했다. 이 모든 건 사랑이 아니고서야 성립할 수 없는 인과관계였다.

 

절대적인 사랑을 해왔던 나에게도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그 날의 기억은 내가 가진 감정이 과연 사랑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피워 혼돈을 야기 시켰다. 이는 이내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하게끔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이의 생각이 필요했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이제야 우리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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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은 아이돌 가수 N 그룹의 민규을 열렬히 좋아하는 m과 만옥, 그런 만옥을 뒤에서 지켜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m과 만옥은 같은 대상을 사랑했지만 방식은 조금 달랐다. m이 기록에 의존했다면 만옥은 실재에 의존했다. 금방 변질하고 휘발되는 짧은 실재의 기억보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과거를 회상하는 걸 m은 선택했고, 만옥은 눈에 담은 실재를 사진이 망쳐버린다는 생각에 오로지 자신의 모든 감각에만 의존했다. 3부에 나오는 한 남자는 만옥을 짝사랑한다. 아이돌과 팬 사이에 일어나는 내용의 소설에 남자의 등장은 뜬금없기도 하다. 그러나 m과 만옥이 민규를 사랑했던 모습과 남자가 만옥을 사랑했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년간의 팬 활동 경력을 가진 내가 바라본 책은 현실고증을 잘했다, 라는 말을 넘어 현실 그 자체였다. 아이돌과 팬 사이에 일어나는 일,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정, 각자의 마음속 깊이 내재한 검은 욕망에 관한 모든 것들이 너무도 정확히 묘사돼 내가 m이나 만옥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 또는 나의 검은 속마음을 작가가 훔쳐보고 집필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에 이르기까지 했다.

 

 

 

가장 견고하면서도 유약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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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팬들을 오빠 쫓아다니는 애들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오빠를 쫓아다니는 애들이 아니라 오빠보다 먼저 가 있는 애들이에요.” -142p
 

 

팬들의 사랑은 강하다.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고결하고도 위대한 단어는 팬이 주체가 되는 순간 타인으로부터 받는 갖은 시선으로 인해 금세 더러워지기에 십상이다. 비난, 질시 등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부정적인 단어들의 거친 풍파와 맞서는 건 팬들의 몫이자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냉정함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다 보면 그 형태는 점차 단단해지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진다. 팬들은 자신의 별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더러운 바닥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늘 밑에서 우직하게 버티고 있다.

 

팬들의 사랑은 약하다. 얇은 유리조각과도 같아서 때로는 작은 자극에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자신의 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 약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사랑의 크기가 커질수록 약점은 그에 비례하여 늘어난다. 늘어난 약점은 공개적이고 넓게 분포되어 이름 모를 타인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또는 자신의 별이 행한 작은 실수나 큰 행동으로 인해, 와장창 부서진다. 부서진 조각들은 이내 사라지지 않고 마음 곳곳을 깊숙이 찔러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알려준다.

   

 
“지금은 새삼스레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대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멤버들과 나 사이에 소통은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일방적인 시선뿐.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믿었고, 교환도 환불도 불가능할 정도로 멋대로 주물러버렸다.” -67p
 

 

팬들이 자신의 별에 향하는 마음을 구석구석 뜯어내 살펴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이라 일컫는 감정이지만, 단순히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겨 자꾸 눈길이 가고 교제 관계로 발전해나가고픈 감정에서 비롯되는 사랑과는 다르다. 이들의 마음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에 담기엔 너무도 복잡하고 괴상한 모양이어서 차마 그 틀에 쏙 들어간다고 말할 수 없다.

 

함께 올라가고 싶은 동료애, 성적 욕망이 결부된 호감,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룬 것에 대한 동경심, 동경심에서 비롯된 자아 의탁, 화려한 삶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의 모성애, 나를 버리면서까지 행하는 희생심, 누구보다 친밀한 관계라 여기는 우정, 현실도피를 위해 찾은 유토피아, 바라만 봐도 좋은 ···

 

이 모든 것들의 결정체가 팬심이다. 어떤 관계에서도 이러한 감정이 모두 들어간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증오하고, 행복하지만 고통스러운,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팬과 연예인의 관계에서 한 곳을 향한 절대적인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치환할 수 없다.

 

 

 

정의할 수 없는 관계



 
“팬의 사랑은 대중매체가 등장하기 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한 사랑이다. 모든 연애소설, 심지어 짝사랑을 다루는 소설에서도 인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과 ‘관계’라는 걸 맺는다. 그러나 팬의 사랑은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41p
 

 

팬과 연예인의 관계는 쉽게 정의할 수 없다. 흔히들 말하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서로 사랑하는’ 등의 말로 간단히 표현하기엔 모순점이 보인다. 책 속의 m은 민규를 ‘대화 불가능한 인간’이라 칭했고, 다른 연애 소설에서의 짝사랑은 그들만의 구축된 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팬과 연예인 사이에는 자신 있게 주장할 만한 실재 관계란 게 없다.

 

팬과 연예인의 만남은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두 시간 반, 그들을 만나기 위해 팬들이 기다리는 시간은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하루 그 이상이다. 많은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자신의 별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 달려도 그들은 서로를 같은 위치에서 마주하지 못한다. 한쪽은 가장 낮은 곳에서 포효하는 죄인처럼 위로 손을 뻗어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다른 한쪽은 가장 높은 곳에서 우아하게 밑을 내려다 볼 때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다. 우리의 만남은 주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별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모두 옳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시기는 이 관계의 모순점을 발견하면서부터 빠르게 지나갔다. 누군가는 여전히 반짝이는 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겠지만, 썩을 대로 썩어버린 머리를 가진 나는, 더는 나와 별 사이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이젠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나는 사랑하길 포기한 걸까. 기다림에 지쳐서? 아니다. 나는 기다림이 좋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기다림이었으므로 그것은 언제나 달콤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그들을 알게 된 이후 매 순간이 기다림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장을 쓰며 그 순간을 간신히 버티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던 걸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통이 좋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을 자발적으로 원한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보다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을 포기한 것은 그날 거대한 신도시의 건물 사이를 돌다가, 막차를 놓칠까 반쯤 뛰다가, 명목상 심어둔 것처럼 드문드문 떨어져 서 있던 가로등 아래에서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때 코트 자락을 너무 세게 털어서, 무언가 같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70p

 

 

m은 손끝이 시리도록 추운 날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사랑의 포기를 스스로 선언한다. m이 사랑을 포기하게 된 배경이 되는 모든 문장을 인용하고 싶었을 만큼 가장 눈길이 갔고, 또렷이 기억되었다. 삶 자체가 팬 활동이었던 내게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공감 가는 말들을 늘어놨던 문장은 많았지만, 단언컨대 이 대목이 가장 나에게 와 닿았다고 할 수 있다. 책을 덮는 순간에도, 어쩌면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뒤에도 잊히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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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던 나에게도 사랑을 포기할 뻔한 순간이 있었다. 처음으로 콘서트를 간 날, 스탠딩을 뛰었고 그들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만옥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나로서는 그들의 실재를 좀 더 추구했고, 몰래 사진을 찍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눈치 보며 휴대폰을 꺼낼 시간에 일초라도 나의 별을 내 눈 안에 담아 감격에 젖는 일이 더 우선이었다. (콘서트 현장을 촬영하면 경호원이 즉시 내보내거나 삭제요청을 한다)

 

공연이 끝나고 혼자 공연장을 나서는 길에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한 멤버의 라이브 방송이었다. 호텔에서 이미 샤워까지 끝내고 와인 한 병을 꺼내 오늘 공연 어땠냐는 질문을 하는 그를 보며 나는 몇 분 동안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각자 집으로 향하던 주변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 틈에서 나 혼자 멍하니 액정을 쳐다만 봤다. 그날을 이후로 나는 꽤 오랫동안 그들을 찾지 않았고, 우리의 관계에서 모순점을 발견해버렸다.

 

사랑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위 대목을 빌려 말하자면, 저녁에 있을 콘서트를 보기 전에 새벽에 일어나 오전 내내 서 있는 알바를 하고 왔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유독 지친 날이라서? 아니다. 알바하며 저녁을 기다리는 시간도 설렘으로 가득 차 달콤하기만 했다. 이리저리 치이고 밟히며 눈앞의 많은 머리를 피해 짧은 목을 길게 내빼느라, 두 시간 넘게 까치발을 든 채로 서 있느라 근육통이 생겨버려서? 아니다. 그따위 고통은 나의 별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내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처음 와보는 동네의 안쪽에 있는 공연장에서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켜 한참을 헤매다 저 멀리 공연장과 분리되는 도로가 보이는 시선에, 집 가려면 한 시간이 넘게 남았다는 사실에, 종일 먹은 거라곤 싸구려 빵 한 조각뿐이라는 배고픔이 그제서야 인지되어, 하나로 보이던 몇만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흩어진 곳에서 혼자 터벅터벅 길을 걷다 무심코 쳐다본 내 발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키가 작아서 통굽을 신었지만 발톱이 깨질까 봐 흰 양말을 갖춰 신었고, 집 갈 때 발의 피로함을 덜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상태였다. 검은 슬리퍼로 미처 가리지 못한 흰 양말의 여백이 더럽게 얼룩져버려서, 그때 내 마음도 같이 얼룩져버린 것이다. 하필 그 순간 다 씻은 쾌적한 상태인 멤버가 라이브 방송을 켰고, 이미 얼룩진 나를 발견했던 것뿐이다.

 

m은 코트 자락을 털며 무언가 같이 떨어져 나가버려 포기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얼룩진 양말이 며칠 뒤 깨끗하게 빨아져서일까, 한두 달이 지나자 나는 다시 바보처럼 그들을 갈구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다. 예전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퍼주는 행위는 더는 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건 변함없었다.

 

*

 

이건 나의 비겁한 고백이자 못난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는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속에 응어리진 많은 말들이 자기들끼리 얽히고설켜 똑 부러지게 표출되지 않음에 분했다. 팬들의 마음이 이런 거라고 누구보다 정확하고 알맞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리며 작성했다. 어쩌면 매일 밤 느꼈을 감정과 생각들을 몇 페이지 안 되는 글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돌에게 관심이 없는 친구에게 네가 부러워, 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대화할 수도 없는 인간에게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만 신경 쓰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런데도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유는 누군가의 팬 생활을 한다는 건 고질병과도 같아서 완치의 개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증오하며 행복과 고통을 느낀다. 글을 완성하는 동안 머릿속은 그날의 기억에 우울하고 복잡해졌지만, 아마 난 이 감정을 잊기 위해 또다시 나의 별을 찾는 모순된 선택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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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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