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완성의 모험, 헤르난 바스의 소년들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6.2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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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 눈 덮인 나라, 끝없는 추락이 이어질 토끼굴. 가끔은 토네이도에 휩쓸려 선택의 여지 없이 모험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모험은 시작하기 위한 입구가 있다. 그러나 운 좋게 모험이 시작될 문을 발견하더라도 쉽게 그것을 열어볼 마음이 서지 않는다. 모험을 즐기지 않는 이에게 모험은 낭만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호기심을 집어 삼킨다. 부족한 용기를 자존심 마냥 꼭꼭 씹고 뒤로 물러서는 순간 그 모험은 다른 주인공을 위한 것이 된다. 몇 번의 모험의 기회에서 공포가 이기고 제자리를 지키다 보면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이 제자리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뒤로 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끝난 전시를 소개하는 것만큼 김 빠지는 일은 없지만 전시는 종료해도 작품은 여전하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느꼈던 순간, 이 기묘한 모험들을 다시 되새기고 싶어졌다. 여태 알던 모험의 감정들과는 달랐으니까. 모험의 클라이맥스에 서 있는 소년들의 표정은 알 수 없고, 태연하고, 심지어 상황과 무관한 것처럼 무심하다. 오로지 낭만만이 극대화된 그들의 모험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 순간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로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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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간 탐색한 결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After Weeks of Searching··· (The Smallest Bird in the World), 2015

 

 

헤르난 바스의 개인전 《모험, 나의 선택(Choose Your Own Adventure)》(2021.02.25-05.27 @스페이스K)은 모호함과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험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두려움보다는 모호함으로, 완결성보다는 가능성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년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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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비가 주룩주룩 왔다, It Fell In Sheets That Day, 2020


 

'그날 비가 주룩주룩 왔다.'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고 빗물이 바다로 녹아 든다. 배를 탄 두 소년은 입을 다문다. 조금이라도 덜 젖으려는 듯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순식간에 젖어버린 지도를 힐끗 살핀다. 이들은 어디로 향하려던 것일까. 아니면 마침내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비가 와서 결국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날'을 돌아보는 감정이 무슨 색이었을지 읽어내기 위해 다가설수록 소년들은 묵묵하게 시선을 비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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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사냥꾼 (혹은 필사적으로 네시를 찾아서), The Monster Hunter(or, Desperately Seeking Nessie), 2020

 

 

세찬 비를 만난 소년들과 달리 이 소년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배경에 자리한다. 팽팽한 적막 속 요동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소년의 파란 눈동자다. 그는 네시를 찾기 위한 모험을 이어오고 있다. 아직 소득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네스호에 살고 있다는 괴물의 자료가 가득하다. 바다뱀, 호수괴물, 네스호의 비밀을 담은 서적부터 지도, 포스터, 창가의 네시 피규어까지. 망원경의 끈을 붙잡고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소년은 괴물의 비밀을 파헤쳐낼 수 있을까. 아니면 어른이 되어가며 차츰 잊어갈까.

 

미처 끝나지 않은 소설의 뒷부분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작품 앞에 선 동안 상상에 잠긴다. 이 소년들은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흘러왔으며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그들이 지나온 길을 추측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의 가능성을 따져보며 잠시 현실을 멈춘다.

 

그건 게임북의 진행 과정과 닮았다. 이야기의 분기점마다 선택지가 주어지고,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여러 결말을 맺을 수 있는 방식이다. 실제로 헤르난 바스는 가장 처음 만들어져 유행했던 게임북 'Choose Your Own Adventure'를 전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에게도 이 책은 어린 시절, 모험을 꿈꾸게 하던 책이었을 것이다. 그 기억처럼 사람들이 전시장을 거닐며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험의 순간에 빠지고 전시장 밖에서도 그 영감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의 모험들은 전설과 동화, 문학, 영화 등에서 영향을 받는다. 상어를 잡은 소년을 그린 '젊은이와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영감을 받았다. 소설에서 노인은 우여곡절 끝에 잡은 청새치를 가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상어들에게 공격 당한다. 노인은 상어와 싸운 뒤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지고 터덜터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오랜 사투가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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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와 바다, The Young Man & The Sea, 2020

 

 

헤르난 바스의 소년 어부는 그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다. 노인을 따라다니던 아이는 다 자라 어엿한 어부가 되었다. 청새치를 잃던 날 같이 떠나지 못했던 기억을 밟고 노인을 괴롭혔던 상어와 싸워 가뿐히 이긴다.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전리품을 배에 태워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시큰둥한 얼굴이다. 내리는 비처럼 소년의 마음에 내리는 비도 아직 걷히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은 패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선언했지만 상어에게 패배했던 노인에게 말하고 싶은 어떤 감정인걸까. 소년은 결국 패배하지 않았다. 노인이 살아가는 내내 마음 속 빛이었던 소년은 헤르난 바스의 작품을 통해 그의 신념까지 빛내준 것이다.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잘 알고 지내던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의 이야기를 듣고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한다. 헤르난 바스에게도 쿠바와 바다는 중요한 정체성인데 쿠바에서 플로리다로 항해해 온 부모님의 바다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은이와 바다'는 쿠바계 미국인이자,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의 아들로서 보여주는 자전적인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의 모호함, 가능성


  

한편 모험적인 시각에서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운동감으로 가득한 곳이다. 잘게 부서지는 포말, 흔들리는 수면, 언제 거세질지 모르는 파도로 위험한 순간에도 발이 묶여있을 수 밖에 없는 곳. 바다에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화면에 맴도는 극적 긴장의 상황들은 소년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어느 순간이건 초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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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Out to Sea,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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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목걸이, The Popcorn Necklace, 2020

 

 

모호한 표정으로 잠시 멈춰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상황에 대한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거센 비와 풍랑을 만나 배에 가득 물이 차고, 팝콘 목걸이를 노리는 듯 주시하고 있는 새 떼에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두려움을 아름답게 그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모험심 넘치는 상황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제된 장식처럼 보일 정도다. 미묘한 색감들로 구성된 화려한 화면은 어느새 소년들을 위한 세트장 같다. 몇몇 작품이 패션 화보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들을 같이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헤르난 바스의 작품 속 주인공이 모두 아직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있는 소년이라는 점이다. 특히 초기 작품들에서 과도기를 겪는 소년이 가진 모호한 정체성과 불안정한 감수성이 두드러진다. 추상적이고 거친 배경 속에 소년들은 음울하고 조용한 얼굴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음을 먹을 새도 없이 세계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감당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화면 밖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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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집어 삼킬 풍경, A Landscape to Swallow You Whole, 2011.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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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흐름 (월든의 오두막집), The Thought Flow (Cabin at Walde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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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흐름 (월든의 오두막집), The Thought Flow (Cabin at Walden), 2009. 일부

 

 

그에 비해 최근 작품들은 보다 여유롭고 안정된 모습 같아 보인다. 특유의 우수에 젖은 표정과 내성적인 분위기는 남아 있지만 소년은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주인공으로 고고하게 그려져 있다. 훨씬 분명하게 그려진 배경이 그를 뒷받침 해준다.

 

미완성의 불안이 이제 혼란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도약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을, 관객들의 상상력으로 틔워 소년들은 모험을 펼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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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뭄 후의 시작, The Start of The End Of The Longest Drough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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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 The Guru, 2013-2014

 

 

가장 오래된 작품부터 현재까지 쭉 걷다 보면 마치 한 소년의 성장을 함께 하는 것 같다. 소년은 점차 분명해지는 얼굴로, 구석에서 화면 중앙으로 이동하며 완성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미묘하게 빗겨 나가던 시선들은 조금씩 정면으로 관객과 마주보기도 한다.

 

언제나 모험은 두려움의 동의어라고 생각했으면서 소년들의 모험에는 비싯 웃음을 흘리게 된다. 주제가 무엇이 되었건 일단 아름답기 때문일까. 애매하고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대한 즐거움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름다움 속 미묘한 표정의 소년들이 마음에 든다. 모험이란 거창한 타이틀에 쥐고 있던 긴장이 툭 풀린다.

 

인생이 거대한 모험의 순간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살다보니 그보다는 작고 사소한 모험의 연속이다. 하지만 작은 모험에도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는 날엔 그 시작점에 설 수 없을 만큼 작아지곤 한다. 낯선 곳에서 헤매야 할 때는 손을 뻗는 것조차 두렵다. 그러나 미완성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소년의 이야기를 만난 관객들에게서 다양한 이야기가 시작되고, 헤르난 바스가 결코 노인이 패배하도록 남겨두지 않았던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선 채로는 어떤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다.

 

모험은 가능성이기에 낭만적이다. 헤르난 바스의 소년들이 아름다운 이유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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