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재난'이라는 괴물, '빛'이라는 희망 - 체르노빌 1986

글 입력 2021.06.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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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사인 올가는 우연히 과거에 연인이었던 알렉세이와 재회한다. 두 사람은 서로 반가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일까? 한 번 멀어진 두 사람의 사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한편 평화롭던 어느 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의문의 폭발 사고가 발생하고 소방관인 알렉세이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간다.

 

1986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주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피폭자가 발생했다. 이때 누출된 방사능은 약 5.3 엑사 베크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양이다. 오늘날 체르노빌 사고는 지난 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더불어 사고 레벨 7등급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이후에 태어난 나에게 이 사고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마치 역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보는 듯 어렴풋하고 아스라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함께 체르노빌을 소재로 한 다양한 콘텐츠가 등장하면서 이 사고는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미국의 HBO에서 제작한 5부작 드라마 <체르노빌>일 것이다. 그리고 올여름, 이번엔 러시아에서 체르노빌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체르노빌 198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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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와 드라마


 

<체르노빌 1986>을 말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십중팔구 드라마 <체르노빌>을 떠올릴 것인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 <체르노빌>과 영화 <체르노빌 1986> 완전히 다르다.

 

드라마 <체르노빌>은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당시 근무했던 원자력 발전소의 직원들, 사고 진압에 참가한 소방관, 군인, 마을 주민, 정치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해당 사고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나아가 이 드라마는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는데 발전소의 직원들과 정치인들의 모습 등을 통해 해당 사고가 얼마나 끔찍한 참사였으며, 동시에 터무니없는 인재(人災)였는지를 낱낱이 드러낸다.

 

반면 영화 <체르노빌 1986>은 다르다. 이 영화의 장르는 재난 드라마보다는 오히려 액션 스릴러에 더 가깝다. 다루는 사건의 범위도 다르다. 드라마는 체르노빌 사고 발생과 수습의 거의 모든 과정을 다루지만, 영화는 사고 초기에 냉각수 배수 작업을 위해 투입되었던 세 명의 잠수부에 대해서만 다룬다. 또한 공간에 따라 액션 스타일을 변주하며 서스펜스를 자아내 대중적인 매력을 강조했다는 점도 영화만의 또 다른 특징이다. 헐리우드만큼은 아니지만 여름철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나름의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드라마 <체르노빌>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당시의 사건을 여러 사람들의 시선에서 복합적으로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영화 <체르노빌 1986>은 현장은 충실하게 재현하되 영화 속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은 허구의 이야기로 채워놓는다. 대신 볼거리와 액션의 서스펜스 등을 통해 장르 영화적인 쾌감을 극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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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테크니션의 등장


 

영화 <체르노빌 1986>에서 주목할 점 중 하나는 바로 감독인 다닐라 코즐로브스키의 연출력이다. 그는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기도 하다. 혹시나 싶어 그의 커리어를 조사해봤더니 아마도 이번 영화가 그의 감독으로서 첫 데뷔작인 듯하다. 이제 겨우 서른여섯의 젊은 감독이, 그것도 배우 출신에, 이전에 장편 영화를 단 한 번도 연출해본 적 없던 사람이 자신의 데뷔작으로 이 정도 규모의 영화를 선택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그의 이번 도전은 합격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영화에서 다닐라 코즐로브스키는 자신의 배짱과 함께 연출자로서의 역량도 증명했다. 특히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필요한 순간에 음악의 리듬에 맞춰 빠르게 장면들을 전환하는 편집은 긴장감을 만들고, 나아가 그가 기본적으로 뛰어난 테크니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빛과 색을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가령 파마를 하는 4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오프닝 장면만 하더라 미술 소품과 인물들의 의상 등에 다양한 색감을 부여하며 우리가 80년대에 들어섰음을 체감시킨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된 알렉세이가 동료들과 물놀이를 하며 마지막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 장면에서는 물방울을 마치 프리즘처럼 사용하여 빛을 산란시킨다. 이를 통해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를 가장 화사하게 담아내는데 후에 이어지는 재난 장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처연해진다.

 

또한 뒤에서 좀 더 이야기하겠지만 각각의 장소에 맞춰 액션을 구성하고 서스펜스를 만드는 솜씨 역시 초보 감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이제 겨우 서른여섯에 불과한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앞으로 연출자로서 그가 보여줄 영화들이 절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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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난’이라는 괴물


 

<체르노빌 1986>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재난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가령 대부분의 재난 드라마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앞서 여러 가지 전조 현상을 보여준다. 단적으로 <판도라>만 하더라도 사고가 폭발하기 전, 노후화된 발전소를 두고 갈등을 벌이는 대통령과 총리의 모습이나 갑작스러운 쥐와 새떼의 움직임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재난의 참상을 암시한다.

 

하지만 <체르노빌 1986>에는 그런 전조 현상이 없다. 심지어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예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러다 문득,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발전소는 폭발해 버린다. 이때 관객들이 느끼는 건 당혹감이다. 그리고 그건 35년 전, 체르노빌의 사람들이 느낀 것과 같은 종류였다.

 

뿐만 아니라 재난을 단순히 수습하고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 기존의 영화들과 달리, <체르노빌 1986>의 재난은 마치 꿈틀거리며 살아움직이는 한 마리의 괴물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부분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게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는 시퀀스와 세 명의 잠수부가 배전함 복구를 위해 발전소 내부로 진입하는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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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화재 진압 시퀀스의 액션 테마는 규모의 서스펜스다. 발전소 외부를 무대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소방관들을 핸드 헬드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담아내며 당시 사람들이 느낀 혼란까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종종 슬로우 모션을 활용해 방사능에 의해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동료 소방관들의 모습을 알렉세이의 시점 쇼트로 포착하는데,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적이 휘두르는 팔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는 것 같다.

 

반면 발전소 내부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앞서 말한 장면들과 궤를 달리한다. 우선 이곳은 공간 자체가 협소하다. 그렇기에 이전처럼 규모의 서스펜스를 구사할 수가 없다. 대신에 영화는 시간의 서스펜스를 구사한다.

 

임무에 투입된 세 명의 잠수부는 조금이라도 피폭량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임무를 마쳐야 한다. 또한 20분 후에 전력을 공급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만약 그 시간을 어긴다면 작전을 실패하거나, 최악의 경우 수리 도중 전력이 공급되어 감전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배관과 방사능으로 가득한 고온수 등은 그런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동시에 공포심을 자극한다.

 

다시 말해, 앞선 시퀀스가 보이지 않는 적의 횡포에 맞서는 병사들의 무력감을 담았다면, 발전소 내부의 시퀀스는 함정으로 가득 찬 적의 아지트에 잠입해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긴장감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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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배전함을 복구했음에도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자 세 명의 잠수부 중 하나인 보리스는 직접 밸브를 돌려 냉각수를 빼내자며 팀원들을 다그친다. 그는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전소 내부를 헤집듯 돌아다니고 마침내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괴물의 실체이자 일렁이는 빛, 원자로를 마주한다.

 

앞서 발전소 내부에 들어왔던 세 명의 잠수부에겐 각자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수가 없어서 자원했다. 다른 한 사람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킨다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원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아픈 아들을 구하려면 나라가 약속한 보상이 필요해서 지원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막상 원자로를 마주하니 더 이상 다가갈 용기를 잃어버린다. 특히 그들 중 가장 강인했던 보리스조차 눈앞의 열기와 방사능의 파도에 두꺼운 철문을 닫아 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린 도대체 무엇을 건드린 걸까. 철문을 닫고서 무너지듯 내려앉는 보리스의 얼굴에서 절망은 마치 가시처럼 관객의 마음까지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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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빛, 희망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도 벌써 35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날의 재난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도 체르노빌은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뿌린 희망의 씨앗은 끈질기게 버티고 살아남아 마침내 싹을 틔웠다.

 

앞서 말했 다닐라 코즐로브스키 감독은 특히 빛을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단순히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영화의 주제적으로 빛은 중요하다.

 

영화 속에는 두 가지 빛이 존재한다. 하나는 원자로가 만들어내는 불꽃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햇빛이다.

 

원자로의 불꽃은 그 열기와 방사능을 방패 삼아 주변에 무지막지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에 반해 햇빛은 한없이 연약하다. 알렉세이와 동료들이 장난스레 서로에게 뿌려댄 물줄기에도 햇빛은 쉽게 부서지고 파편화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없이 부서지고 나노 단위로 쪼개질지언정,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반짝인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아직 이곳에도 희망은 남아 있다.

 

물론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분명한 영화다. 가령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는 올가와 알렉세이의 사랑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이르면 영화의 결과 맞지 않는 느낌을 준다. 플롯의 창의성이나 기발함도 적은 편이다. 드라마와 비교하면 비판의 수위도 꽤 낮다.

 

(물론 이 영화도 나름의 비판을 하긴 한다. 습관처럼 내뱉는 ‘위대한 소련의 과학’은 사고 이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임무에 의무와 허울뿐인 보상을 외치며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노동절 행사만 챙기는 모습을 통해선 당시 체제의 무능과 불합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여름 블록버스터로서 나름의 재미를 제공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희망이 필요한 시대에 이렇게 희망을 이야기해 주는 작품이 있다는 게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인류 최악의 재난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띄웠을까. 오는 6월 30일, 극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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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1986

- Chernobyl: Abyss -

 

 

감독 : 다닐라 코즐로브스키

 

출연

다닐라 코즐로브스키, 오크사나 아킨쉬나,

필립 아브디브, 니콜라이 코작

 

장르 : 액션, 스릴러

 

개봉

2021년 06월 30일

 

상영시간

1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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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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