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80년대 소련이 담긴 '체르노빌 1986' [영화]

글 입력 2021.06.2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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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6일


 

9월 12일

5월 15일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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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개 혹은 몇십 개의 날짜를 기억한다. 친구나 가족의 생일, '완벽'에 가깝다고 느낀 어느 하루, 짜릿한 성취감이 묻어난 숫자들 따위다.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 말고도 몇 개를 더 안다. 하나는 2014년 4월 16일이고, 다른 하나는 1986년 4월 26일이다. 전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사람들은 후자를 보고 갸웃거릴 것이다. 저게 무슨 날이길래?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날이라고 덧붙이면 의아할 테다. 아무런 연고 없는 나라의 대규모 참사일까지 외우느냐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몇 달 전에 HBO에서 제작한 드라마 <체르노빌>을 꽤 감명 깊게 보았고, 관련 영상을 찾아보다가 눈과 귀에 익었을 뿐이다. 다만 존중의 의미를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과거의 파편을 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끼기에.


그 방법은 다양하다. 역사서에 적을 수도, 매주기에 기념식을 열 수도, 대화 중에 언급할 수도 있다. 그중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가장 넓은 건 콘텐츠화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여전히 이어진다.


6월 30일에 개봉을 앞둔 영화 '체르노빌 1986'을 기다리는 대부분은 왓챠에서 체르노빌 드라마를 본 사람들일 것 같다. 나도 그중 하나다. 관람 전에 염두에 둘 점이 있다. 그 드라마와 비슷한 톤이나 분위기를 상상하고 관람한다면 꽤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 영화는 미용사의 찰칵찰칵 가위질로 시작하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르듯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과학적인 설명을 토대로 사고가 발생한 원리를 말하는 것에 집중하고, 또 다른 이는 사건 자체보다 그 당시에 주목한다. 이쯤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영화의 초점은 후자다.

 

 

 

그 날을 재현한 흔적들



과거를 재현하는 건 쉽지 않다. 1년만 지나도 주변에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음식점, 카페, 편의시설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현재에 가까운 과거일수록 수월함은 있겠다. 시각 자료와 실존 인물의 증언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고, 주변 환경도 크게 뒤바뀌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1986년의 소련은 어느 쪽에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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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은 현재 우크라이나의 도시이다. 국가 이름이 바뀌니 35년 전 이야기가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원전 폭발 이후, 체르노빌 주민들은 키예프로 강제 이주하였다. 그때의 생존자들은 이전과 다른 생활양식에 익숙해진 상태다. 인간은 부정적인 기억을 훨씬 잘 기억한다지만, 트라우마처럼 남았을 일은 꺼내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도 제작팀은 사람들의 증언, 물건, 흔적을 수집하며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4월 26일을 하나의 퍼즐 판으로 맞추었다. 그리고 세트장을 꾸리는 데에 적용했다. 스튜디오에 마련된 병원 세트장은 1980년 대의 병원 타일과 바닥, 문을 그대로 되살렸다. 앰뷸런스, 소방차 등도 과거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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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등장인물의 옷차림도 눈에 띈다. 화려한 색감과 다양한 스타일. 참사 전후의 대비를 위해 최대한 밝고 경쾌한 색을 사용했겠지만, 당시의 옷차림 또한 고려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까지는 사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상적이었던 건 수중 촬영을 스턴트 없이 진행했다는 것이다. 배우들과 촬영팀은 다이버 인증을 받아 과거의 현장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잠수복을 입은 상태에서 50도가 넘는 수온을 견디고, 손전등에 의존해 캐릭터를 연기하는 작업은 험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 장면을 보면 왠지 모를 긴박함과 그들 간의 전우애가 느껴진다. 같은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에 진정성이 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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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의 색감도 기억난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 강조되었다. 폭발 전후로 분위기 반전이 크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라고 본다. 절망, 괴로움, 슬픔, 경악도 곳곳에 나왔지만, 궁극적으로 희망과 안도를 향한 결말이었다. 참혹한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던 드라마 '체르노빌'은 이와 정반대로, 푸르고 어두운 톤이었다.


이렇게 각 영상물의 기획 의도와 제작 배경을 파악한 뒤 이야기를 살펴보면, 같은 것을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닫는다. 표현 방식이 제각각이어도 그 뿌리는 하나임을. 그날을 기억하고, 비슷한 움직임이 생기는지 주시하고, 재발하기 전에 지키자는 마음은 누구건 똑같을 것이다.

 

 

 

흔적은 기억으로 이어져



글을 마무리 지으며, 영화 속 인물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바로 미용사 '올가'와 소방관 '알렉세이'의 아들 '알렉세이'다. 폭발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 그 때문에 방사능 피폭으로 치료가 시급해지고, 알렉세이의 노력으로 스위스에서 전문가의 치료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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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해 보이는 상황. 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 인물은 영화 끝자락에 다시 등장한다. 수척한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려 올가와 포옹한다. 당연히 죽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인물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주연은 아니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오롯이 담은 배역이다. '참사로 인한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난 사람' 그 자체다.


이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오늘을, 내일을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기도 한다. 저 어린 애가 온 힘을 다해 살아내는데 나라고 못 할 것이 있겠는가, 하면서. 과거의 사건을 말하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현재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렇기에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었음에도 리얼 다큐멘터리보다는 '영화스럽게' 보인다.


앞서 이야기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두 알렉세이와 올가의 이야기를 오는 30일에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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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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