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도서/문학]

그녀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 입력 2021.06.0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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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로 유명한 한강은 실은 소설보다 시를 먼저 발표했다. 한강은 시를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써 놓았던 시 60편을 묶어낸 시집을 냈는데 그것이 바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시집이다.

 

총 5부작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 1부 새벽에 들은 노래/2부 해부극장/3부 저녁 잎사귀/4부 겨울 저편의 거울/5부 캄캄한 불빛의 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몇 편의 시를 가지고 이 시들이 작가의 시 세계에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저녁의 소묘 3> - 유리창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붉은 것 없이 저무는 저녁

 

(중략)

 

(이런 저녁

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처음 이 책에 흥미가 있었던 이유는 어딘가 알 수 없는 제목 때문이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니. 저녁을 도대체 어떤 연유로 서랍에 넣어둔 것일까. 서랍에 넣어두는 이유는 그것이 소중해서였을까, 서랍에 넣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런 질문들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그녀에게 ‘서랍’의미는 무엇이었으며 ‘저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그렇게 슬픈 마음으로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을까.

 

이 책의 첫 번째 시 인 <어느 늦은 저녁>에서 늦은‘저녁’에 밥을 먹으면서 무언가가 지나가 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관성적으로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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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저녁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시간대였던 것 같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무엇인가를 항상 잃는다. 무언가를 잃고 또 무언가를 얻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간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것은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가야만 한다. 작가 한강은 그런 인생에 대한 철학을 저녁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려도 [밥을 먹어야지]. 즉, 삶이 힘들어도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이 엿보인다.

 

그녀가 저녁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는 몇 편 더 있었다.

 

<저녁의 소묘 3>에서는 붉은 것 없이 저녁이 저문다. 그녀는 어쩌면 오후 5시쯤의 붉은 노을을 싫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으로 가기 전의 노을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그녀는 조용한 저녁을 맞는다.

 

그런 저녁이면 그녀는 서랍에 심장을 넣어둔다.

 

뜨겁고 펄펄 뛰는 심장을 서랍에 고스란히 넣어둔다. 그녀의 저녁이 ‘조용한’이유다. 몸에서 제일 시끄러운 부분을 밖에 빼어 두고 조용한 저녁을 음미한다. 아마 그것이 그녀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둔 이유였던 것 같다.

 

조용한 저녁에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면서 뜨겁고 내 몸을 불태울 일일랑 던져두고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보는 것이다. 저녁이면 그녀는 차갑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침묵’을 배운다.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실제로 작가 한강의 목소리는 마치 숨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뱉는 것처럼 들린다고 한다.

 

한강은 조용한 저녁에 자신을 돌아보며 또 한가지 인생에 대한 철학을 공개한다. 입술을 열어 할 말이 없을 때면 ‘침묵’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의 세계에서 이 시는 그녀의 인생을 짧게 요약한 것처럼 보인다. 뜨거운 낮을 지나 조용한 저녁이 되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저녁의 우울함을 음미한다. 저녁의 우울함이란 이따금 찾아오는 자신의 사색쯤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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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 <피 흐르는 눈3>을 보자면 그녀는 [부서진 입술],[어둠 속의 혀] 라던지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라는 말들을 사용한다.

 

그녀가 여전히 쉽게 말을 꺼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서진 입술과 어둠 속에 있는 혀로는 무엇을 말하기 힘들다. 또한 허락된다면 묻겠다는 문장 속에는 여전히 말을 하는 것에 조심스러움을 느끼고 있음이 보인다.

 

그녀가 그렇게 감히 물을 지 말지 고민하는 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있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를 읽으면 그녀의 고통이 눈에 보인다.

 

그렇게나 부서졌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다. 앞서 말한 관성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일관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이유 모를 고통에 힘들어한다는 것이 위로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슬프기까지 했다. 언제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회복기의 노래>

 

(중략)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다행히 한강은 고통만 이야기하진 않았다. 시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희망과 밝은 기운이 엿보였다. 어쩌면 그녀가 조금은 행복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일까 싶었다. 시의 제목이 회복기의 노래인 이유는 여태껏 아파했던 시기에서 벗어나는 중이라는 의미일 테다.

 

붉은 것이 없는 저녁을 지나 그녀의 집 안으로는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햇빛을 정면으로 맞이한다. 햇빛만큼 좋은 기운을 주는 게 있을까. 눈을 감고 햇빛을 맞을 때면 온갖 잡생각이 지워진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우울한 저녁부터 햇빛 가득한 모습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저녁을 맞이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에도 눈에서는 피눈물이 아닌 눈물이 흐른다. 한강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은 차갑고 냉철하다. 그러나 그 시선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억지로 포장한 단어들이 아니라 날것의 고통을 볼 수가 있어서. 그것이 나만 느끼는 게 아니였구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박소희 태그.jpg

 


[박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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