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화된 시간, 선명한 사랑 -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경계의 허묾에 대해
글 입력 2021.06.02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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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노르 드 레콩도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을 기획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엘 그레코 미술관’을 차지한다. 눈으로 그림들을 보듬고, 손으로 바이올린을 켜며 한 사람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일명 엘 그레코로도 알려진,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다. 16세기 인물인 도메니코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레오노르. 그녀의 사연은 무엇일까?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저자 레오노르 드 레콩도가 왜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는지, 화가 도메니코스가 그녀에게 준 영향은 무엇인지, 도메니코스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그녀의 시선에서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시에서 읽을 법한 감각적인 표현과 소설을 읽는 듯한 독특한 시점을 활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


 

레오노르는 도메니코스를 사랑한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여인이 되어 5세기 전 인물인 도메니코스를 열망한다. 오직 그를 만나고자 파리에서 스페인 톨레도로 날아온다.

 

 

“도메니코스, 당신의 손이 당신이 그린 인물들의 손만큼 길고, 창백하고, 유려하기를 바라요. 움직임 속에서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인물의 시선을 연장하고 표현력 풍부한 연속성이 되는 그 손들 말이에요.”


- 19p

 

 

그녀는 이미 15년 전, 바이올린 콘서트 투어 중 부모님과 엘 그레코 미술관을 방문했다. 부모님은 온갖 미술관에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이해와 성찰의 힘을 길러주는 시선을 교육했다. 그 덕에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라는 스페인 화가 3인방의 그림에 경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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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스페인에서 레오노르는 도메니코스의 흔적을 어루만진다. 미술관을 찾기 전, 그의 작품이 걸려있고,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던 교회를 찾는다. 사진을 찍고, 수녀와 대화를 나누며 한 공간에 있었을 그를 상상한다. 예배당에서는 거룩하게 도메니코스를 부르는 의식을 치른다.

 

고요 속에서 바이올린으로 바흐를 연주하고, 그다음은 춤. 자신과 하나가 될 몸을 소환한다.

 

 

 

도메니코스, 엘 그레코



 

“이 아이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다. 그는 행복하고 사랑받고 있다. 섬 밖으로의 여행, 톨레도, 그림, 회계, 소송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그를 기다린다는 것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지각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는 여섯 살이다.”

 

- 24p

 

 

작가는 도메니코스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생생하게 진술한다. 16세기 중반, 항구 마을에서 자란 도메니코스가 물고기를 든 바구니를 이고 달리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하고, 살모사와 맞닥뜨린 여린 아이의 두려움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레오노르는 화가 엘 그레코가 아니라, 인간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를 말한다.

 

도메니코스는 그가 자란 크레타 섬을 떠나 베네치아로 향한다. 섬에 함께 두고 온 여인, 아리아나. 그는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종교적 작품을 만드는 ‘이콘화가’가 아니라 그냥 ‘화가’가 되고 싶었다.

 

모두가 추앙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공격하는 대범함을 지닌 그는, 동료들의 조롱을 물리치며 스페인 톨레도에 도착한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jpg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년경 ©위키미디어 커먼즈

 

 

축제가 일어난 광장에서 그는 자신의 사랑 헤로니마를 만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헤로니마는 아들 호르헤 마누엘을 낳다가 사망한다. 그는 인정받기까지 수많은 곡절을 겪고 소송을 한다.

 

시간이 흐른 후,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그리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고단했던 생활을 떨치고 돈을 벌어들인다. 그의 아들은 뮤즈로, 좋은 파트너로 일생동안 그와 함께한다.

 

 

 

시간을 뛰어넘는, 형식을 뛰어넘는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에세이, 편지, 소설, 시 등 다양한 글의 형식을 빌려온다. 처음 제시된 ‘에세이’ 형식에만 갇혀 있다면 조금 혼란스러울 것이다. 책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형식을 넘나들며 예술을 자신만의 독보적인 시선으로 관통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작가는 음악, 미술, 글의 아름다움을 한 권의 책에 포섭해 놓는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형식(“나는 그림이 없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기다렸다. - 52p), 도메니코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도메니코스.” - 65p), 도메니코스의 감정을 대변하는 소설/전지적 작가 시점(“동료들의 조롱에 대꾸할 말이 많았지만, 도메니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43p), 작가의 감정을 표현한 (처음으로/귀를 기울였다./파란 기지개,/하얀 섬광,/초록 통로/ - 29p)를 활용한다.

 

작가는 에세이 형식을 통해서는 조명이 꺼진 미술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편지 형식으로는 도메니코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소설을 읽는 듯한 3인칭 시점으로는 도메니코스의 일생을, 시로는 함축된 시어들을 통해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한다.


*

 

사실 레오노르, 그녀는 도메니코스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각자의 시간성을 무화(武火)하지 않는 한”(20p)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믿는다. 도메니코스와 합일하는 순간을 믿는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어둠 속 빛을 통해, 선명하게 굴곡진 입술을 타고 오리라는 것을.

 

 

이것이 시간의 변경에서

우리가 나누는 입맞춤이에요,

하늘의 틈새들,

알아보았다가

다음엔 잊히는 얼굴들,

굶주린 몸들,

포삭한 피부를 따라

우리의 발이 밟는

최초의 정원의 시간.

 

야만스러운 사랑 속에서 나눈

우리의 입맞춤,

우리 욕망의 불길,

거기서 나오는 무분별.

 

밤인데도 불구하고, 빛.

 

- 158p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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