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가들의 자화상 [시각예술]

예술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 입력 2021.06.0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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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서 주인공 요조는 친구와 함께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는 ‘도깨비 그림’ 같다고 말한다. 그는 그림 속에서,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를 목격한다. 익살이라는 가면으로 자신을 감추고는 있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이 간파당할까 두려워했던 요조는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일군의 화가들’에게 경외심을 가지며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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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출판된 <인간 실격>의 표지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 차지하고 있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내용이 생생히 기억난다. 책을 읽었을 당시 활자 사이사이의 틈에 스며든 음울한 분위기에 지배당하여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표지의 인물은 나를 바라보며 메마른 눈빛을 형형히 빛냈다. 그 시선을 있는 그대로 받으며 나는 벌거벗겨진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까지도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중 요조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거나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것에 희열에 잠겼던 것일까. 슬픈 것과 아름다움 사이에는 삶이 있다. 그리고 슬픔을 추악함이란 단어로 교환하는 순간, 삶이란 단어는 사람으로 치환될 수 있다. 우리에겐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으로. 그렇다면 욕망과 아름다움 사이, 그 범위에 화가들은 자기 자신마저 포함 시켰던 것인가.

 

예술가들은 자신의 존재를 끄집어내고 마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13세의 소년일 무렵 자화상을 그렸고, 빛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은 평생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다. 그 밖에도 빈센트 반 고흐는 귀가 잘린 자화상 등 40여 점의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려냈고, 프리다 칼로는 자화상을 통해 불우했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가 각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싶어 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에는 누군가가 살아온 흔적이 한 화면에 담겨있다. 그들의 궤적을 따르며 ‘자화상’이란 무엇이며 그 작업을 하는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에곤 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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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알고 싶은 자는 자기 자신의 예를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만 자기 자신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적당히 봐주어서도 안 된다.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양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 구로이 센지,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매독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와 성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실레는 인간의 실존에도 크게 관심을 가져 인간의 육체를 왜곡된 형태로 거칠게 묘사했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타락한 인간의 내면, 관능적인 욕망, 인간 존재의 불안, 열정, 고통 등을 관찰해볼 수 있다.

 

감정이 응축되어있는 듯한 그 눈빛. 내가 표지 속의 인물의 눈빛에 손쉽게 간파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에곤 실레 또한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엄격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미화시키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해체하여 그려냄으로써 그 자신의 본질 자체에 가깝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생전에 그는 극한의 나르시스트였다고 한다.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은 ‘자기애는 인간 심리의 기본적인 잠재력으로 성장 발달에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라고 보았다. 실레는 이 자기애를 십분 활용했다. 종일 거울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했고 그런 자신의 누드를 그렸다. 그의 자화상은 이상화된 자화상과는 달리 몸이 뒤틀려있고, 일그러져있으며, 뼈의 마디마디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붉은 실핏줄을 강조하여 멍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나약한 육체에 드러나 있다는 말을 남기며, 사람들이 이중성을 감추려하는 모습을 적나라한 누드화를 통해 고발하고자 했다.

 

 

 

렘브란트 반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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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중략)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고, 인간의 표정에 내포되어있는 비밀에 대해 끊임없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 보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미술사학자>

 

 

위의 문장은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에 쓰인 문장과도 상통한다.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을 객관화하기 위해, 꿰뚫어 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으며,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일련의 자화상 속에는 변화하는 작가의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의 인물이 내면에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렘브란트는 한 인간의 내면이 찰나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을 반복해 그리며 인간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폈다.

 

그의 초창기 자화상에는 인기 있는 화가로 급부상하여 승승장구하는 그의 혈기 왕성하고 자신감에 찬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의 중년의 자화상에는 그로 인해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은 성공한 화가의 모습이 나타나 있지만, 마지막 자화상에는 부인과 자식을 잃고 홀로 남은 고독한 모습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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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눈썹을 가진 여인의 뚜렷한 인상. 독특한 화풍. 우리는 곧바로 그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렸던 프리다 칼로. 그녀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18살에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와 자궁을 다치게 됐다. 30회의 수술과 9개월 간의 전신 깁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 번 되돌아온다. 오랜 시간 동안 거동을 할 수 없었던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게 됐고,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여성 편력이 심했던 그는 반복해서 바람을 피웠고, 그녀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른다. 지르기에 이른다. 아픈 몸으로 아이를 원했던 프라다 칼로는 3번이나 유산을 겪기도 한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 프리다 칼로

 

 

그녀는 보통 자기 자신을 그렸는데, 병상에서 가장 자주 마주했던 모습이 그녀 자신이었기에, 그 스스로를 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걷기 위한 수 차례의 수술 끝에 프리다는 가까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은 그녀를 평생 괴롭혔다. 그녀는 신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숙명처럼 느끼며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프리다는 이별을 겪고 오직 자신의 그림에만 집중하여 더욱 치열하게 그려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불행한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직시하며, 멕시코 전통 속에 고독과 고통을 녹여내어 그 어떤 미술 범주에도 들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그림은 전통적인 여성상을 거부하고 솔직 담백한 섹슈얼리티를 담고 있기에 그녀는 20세기 페미니스트로 손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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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자화상은 초기에는 일반적인 형태를 띠지만 점차 내면의 세계를 과감하게 담아내기 시작하며 변화해간다. 난해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표현방식으로 한때 일부 유럽의 예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그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몸이 해체되고 장기가 드러나는 등 육체의 해체를 표현했던 망설임 없는 방식에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으로 승화시켰던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의 한 장면에서 조커는 미술관에서 온갖 고전 명화를 다 망가뜨리다가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멈춰 서고는,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며 그 작품만은 내버려 두자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조커>를 구상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조커가 사랑한 유일한 화가’라고도 불린다.

 

과연 그 수식어에 걸맞게 그의 그림은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깊은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고 때론 잔인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볼수록 솔직히 조금 힘겨웠다. 그는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베이컨은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서 육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참함을 견디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몸은 고깃덩어리 혹은 살점으로 묘사되며 인물들은 울부짖고 괴로워한다.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사실적이면서 대단히 암시적으로 감각의 이면을 들춰내고 싶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 않은가?

 

- 프랜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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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신 자화상은 17여 점으로 적지 않은 숫자다. 이 자화상은 시기적으로 봤을 때, 그의 연인인 조지 다이어의 자살 이후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된다. 밝은 색의 셔츠와 붉은 넥타이를 매고는 있지만 그림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울하고 그는 고독해 보인다. 무릎의 형태는 윤곽선이 모호하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꼬았다면 왼쪽 다리가 땅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의자 뒤편으로 발이 보인다. 베이컨은 논리적인 이치에 맞지 않게 그림 속의 요소들을 배치했고, 인물의 내면적인 모습을 강조하여 나타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그림을 그렸던 것일까. 베이컨은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고 꽤 유복한 집에서 성장했다. 10대 때 베이컨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군인 출신인 아버지는 엄격했다. 그는 18살 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시간이 지나 1960년대에는 거장으로 대우받았으며 1971년 파리에서 대규모 회고전도 열렸지만, 그는 병적으로 육체적 관계에 집착했으며 술과 도박으로 탕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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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화상 속 일그러진 인물들은 분명 왜곡된 형태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속 어두운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기괴함에 간혹 몸서리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순수한 결정을 채집해낼 수 있다. 인간 본연의 고통과 우울, 불안과 외로움 등을 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기에, 그것이 습관화되어 심리적인 고통이 있어도 그것을 바로 알아채기 쉽지 않다고 한다. 또한, 그것을 알아차림에도 부정적인 감정을 한껏 드러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늘은 오늘의 삶을 꼭꼭 씹어 삼켜야 하니까.

 

그런 우리들에게 베이컨의 그림을 보는 순간만큼은 자유가 주어진다. 피하고 싶었던 내면의 고통과 고독의 늪에서 마음껏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자유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였던 조커가 그를 사랑한 것도 자명한 일이다.

 

 

 

예술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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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사진작가 일세빙의 <자화상>이라는 사진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직접 관찰할 수 없다. 거울이나 사진에 비친 내 모습은 좌우가 반전된 모습이며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울이 필요하다. 거울 속의 나는 만질 수도 없기에 입체적인 모습들을 실제보다 자세히 알 수 없다. 시선이나 인식은 이렇듯 왜곡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나는 나의 모습을 아주 명확하게는 인식할 수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거울 속의 내가 나라고 믿게 된다. 사진과 거울은 결국 인간 인식의 한계점인 것이다.

 

2013년 셀피라는 단어가 옥스퍼드 출판사에 의해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지도 벌써 8년이 흘렀다. 유명 관광지에 가면 휴대폰의 전면 카메라를 켜서 자신의 모습을 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필요하다면 여러 가지 필터들로 왜곡과 보정을 감행하면서 마음에 드는 괜찮은 모습을 SNS상에 전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혹은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바탕이 된다.

 

예술가들이 그렇게 자화상을 그려내었던 이유는 내면적 자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더불어 인간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왜곡을 통해서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나 사진으로는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진실하고 입체적인 모습들을 형상화 시키며 그들은 조금 더 자기 자신과 가까워짐을 실감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느꼈을 때, 그가 그려낸 인물만은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자화상을 보며, 나보다 먼저 삶을 살아냈던 이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보면서 나는 가슴 깊이 공감의 위안을 얻기도, 격려를 받기도 했다. 가슴 속에 누군가의 자화상 몇 개를 품어두고 삶에 고난이나 풍파가 몰아칠 때, 망망대해에서 홀로 표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살며시 조언을 구해보는 것이 어떨까. 답 없는 물음일지라도 먼저 겪은 이들의 눈빛과 마주함은 그 자체로 힘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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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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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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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빠진주황머리
    • 마침 어제 예전 핸드폰을 뒤져서 저의 불과 2-3년 전 사진을 찾아봤어요. 지금과는 참 다른 느낌이더라구요. 사실 예전 핸드폰을 꺼내든 이유는 지금의 제 얼굴을 모르겠기 때문이었어요. 손안에 모든 미디어들은 세상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내뿜는 많은 얼굴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너무 동떨어져보였어요. 나의 개성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저의 얼굴을 저는 몰라요. 자화상을 그렸던 많은 이들이 저와같은 마음이었을까요? 물론 같은 맥락은 아니었겠지만, 여러 이유들로 자신의 얼굴을 잃을까, 나 자체를 잃을까 싶어 자화상을 그렸던 것이었을까요. 글을 읽고 나니 나의 가장 깊은 내면과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 모순적이게도 나의 얼굴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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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세나
    • 2021.06.17 09: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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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빠진주황머리댓글 작성자님의 글을 읽으니 그들이 그 순간의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다른 해석을 남겨주심에 감사드려요. 몰개성시대의 천편일률적인 아름다움보다, 작성자님 본인의 자연스러운 매력이 얼마나 근사한지 저는 압니다. 물빠진 주황머리도 이번에 다시 물들였으니,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더욱 과감하게 매력을 뽐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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