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탁구 시합 [사람]

글 입력 2021.06.0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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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탁구에 미쳤다. 가게를 가도, 음식점을 가도, 하물며 수영장을 가도 탁구대가 있었다. 핑퐁, 핑퐁. 작고 가벼운 공이 여기저기 얻어맞는 경쾌한 소리는 어딜 가나 들렸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탁구 영웅들이 나고 자라기로 유명한 곳도 아니었다. 국가대표는 고사하고, 지역 부수 대회에서조차 조용했다.

 

여기는 공식적인 심판도, 지켜야 하는 룰도 없는 막무가내 탁구를 좋아했다.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모를 이 괴상한 탁구를 모두가 사랑했다. 여느 스포츠 경기처럼 시즌이 존재했지만, 근본 없는 경기의 시작과 끝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시작했다 싶으면 다들 눈치 보며 참여했고, 너그러운 접수처는 한참 경기가 진행된 후에도 계속 열려 있어서 중간에 투입되는 이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보통 제 주변의 사람들과 탁구를 쳤다. 회사 동료, 같은 반 짝꿍, 학교 선생님, 동네 병원 의사, 간호사 등등. 저마다 인연이 닿는 이들이 대련 상대였다. 10대, 20대들은 저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탁구를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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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우승자는 당시 가장 핫했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시즌이 막 열렸을 때까지만 해도 잘생겼다고 소문난 아이돌 멤버가 강력한 우승 후보였는데, 중간에 크게 사고를 치고 나서는 제 실력 발휘를 통 못하고 떨어졌다. 엉망진창 탁구 대회는 탁 구 스킬만으로 우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준결승까지 올랐었다. 우승자였던 배우와 맞붙게 되었는데, 나는 당연히 내가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꽤나 자신감이 있었고, 상승세였다. 준결승까지 올라간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살짝 도취된 감도 있었으나, 주변에서도 나의 승리를 예측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가 그에게 결승을 내주게 된 이유에는 그의 친절이 있었다. 시합 이틀 전,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에 우연히 무대인사를 끝내고 퇴장하는 배우를 만났다. 배우를 따라 쏟아져 나온 팬들에 휩쓸려 넘어질 뻔한 나를 붙잡아 준 그가 괜찮냐 물었다.

 

멀쩡한 것을 확인하더니 예쁘게 웃고 가버린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배우를 꼭 우승시켜서 저 친절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와 미소를 널리 알리리라. 시합 날 나는 뚝딱대며 - 꽤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평했다. - 경기를 망쳤고, 그는 무난히 우승길에 올랐다. 나는 꽤나 오랫동안 그의 추종자가 되었더랬다.

 

이번 시즌의 우승자가 정해졌다. 내가 신입생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대학 선배였다. 지난번, 자의적으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나는 이번에 결승까지 올랐다. 선배는 지난 시즌의 2등이었으나, 기세가 오른 영화배우에게 아쉽게 패배했었다. 선배는 늘 경기에 진심이었다. 매번 최선을 다했고, 우승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반면의 나는 우승에 대한 큰 욕심도 없었거니와, 선배가 원한다면 기꺼이 우승 자리를 내줄 수 있었다.


나에게 탁구는 그랬다. 매번 참여는 하지만 그냥 그런대로, 내 순위가 몇이든, 누구 우승을 하든. 그래서 나의 경기는 건조하고 싱거웠다. 그런 것치고 매번 나쁘지 않은 성적이 나와서, 그것이 내 나름의 매력이거니 했다. 7:11. 결승 경기는 나를 닮아 무난하게 끝났고, 선배는 우승자가 되었다. 경기에서 승리한 선배가 웃는 것을 보고 괜히 울컥했다. 선배를 얼싸안고 우는 나를 보면서 선배는 누가 보면 네가 이긴 줄 알겠다며 핀잔했다.

 

그 후로 선배와 더 많이 만났다. 탁구 대회의 우승자와 준우승자라 하면 으레 친밀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선배는 늘 친절했고, 배울 점이 많았다. 나는 그런 선배를 좋아했다. 제 일처럼 내 걱정을 함께 고민해 주고 있는 선배를 보고 있으면 인복은 타고났구나 싶었다. 나 역시 선배에게 그런 존재겠거니 했다. 우승은 못 했어도, 나는 준우승자이지 않나. 나는 우리가 깊은 교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선배의 인스타에 선배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와 찍은 사진과 함께 글이 올라왔다.


“나의 1등, 정말 감동이었어. 언제나 고마워!"


나는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다음날 선배에게 인스타 글에 대해 물었다. 선배는 어제 결승전을 치렀다고 했다. 이미 나와 결승을 치르지 않았던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의 등수를 물었다. 선배는 내가 5등이라고 했다. “너를 정말 아끼지만 이번 시합의 영향이 컸어. 11:0이었잖아. 조금 성의가 없는 것처럼 느꼈어.” 선배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아, 내가 만족했던 경기는 오롯이 나만의 경기였구나.

 

탁구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핑퐁 핑퐁. 네모난 공간에 얇은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사람,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작은 동그라미. 코트가 몇 미터 되는 것도 아니니 공이 닿을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그 안에서 동그라미가 네모 밖으로 튕겨져 나가기 위해선 제대로 된 빈틈을 공략해야 한다. 상대방이 쉽사리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공을 튀겨야 한다. 나는 그 방법을 수행했나. 그렇지 못했다. 누굴 대하든 같은 방식으로 라켓을 쥐었고, 같은 곳으로 공을 튀겨서 수가 뻔히 읽혔다. 그 어느 것도 코트를 벗어나 선배의 마음으로 튀긴 공이 없어서. 그래서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 아쉽다고 선배는 말했다.

 

우리만의 엉터리 탁구가 11:0이든 11:7이든 이기면 우승, 지면 아래 등수가 되는 일반 탁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경기의 과정이 등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시험 결과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기에 각자가 매긴 점수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압도적으로 끝나버린 시합은 재미가 없다. 랠리가 길어지고, 선수들이 땀을 흘릴수록 경기에 흥미가 더해진다. 한두 번 왕복한 것보다 수십 번을 반복해서 그려낸 공의 궤적을 볼 때 더 짜릿하지 않나. 그 스릴 있는 랠리 뒤에 터진 결정적 스매싱 한 방에 관중과 선수는 희열을 느끼고,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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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을 코트 안에 욱여넣었다 치면, 칭찬이든 비판이든 무조건적인 애정공세든 가장 물러터진 부분을 강타한 한 방을 기억하게 된다. 자신이 받아치지 못한 공격을 분석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깨닫게 되고, 이를 위해 들였던 상대방의 기민한 노력을 기억한다. 자신의 속성을 알게 되면서, 그 속성을 느낄 때마다 상대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성장하고 유대가 쌓인다.


나는 선배가 내게 던져준 공격을 속절없이 받아들였고, 선배의 세심한 타점에 감탄했다. 이에 대한 감사도 충분히 표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선배에게 더해진 것 없던 경기가 그의 기억에 남을 리 없었다. 이것은 랠리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연습일 뿐이었다.

 

더 좋은 경기를 위한 노력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경계는 경쟁에서의 승리보다 애정이 담긴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기억하자.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임을, 압도적인 승리가 아닌 치열한 접점을 벌일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우승자가 되어준다는 것을 말이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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