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족이라는 느슨한 울타리

영화 '와일드라이프'가 보여주는 것
글 입력 2021.05.1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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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가정 내 아동학대 사건과, 어린이에 대한 혐오표현들을 보고 있으면 가족이라는 게 뭔지, 성장한다는 건 또 어떤 건지 고민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 안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왜 어린이의 미성숙함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 어린이의 무지와 미성숙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분노하고, 조롱하는 것을 보면 대체 ‘성숙함’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어린이 스스로에게도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필요한데, 어른들이 그것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조롱거리로 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른들도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의 미성숙함을 받아들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는 가족이라는 건 절대 무너지거나 변하지 않는 튼튼한 벽 같은 것이고, 엄마와 아빠는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마와 아빠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성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족들 간의 갈등이 있을 때도 가족이라는 건 사실 서로 다른 네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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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리처드 포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와일드라이프>(2018)다. 배우 폴 다노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열네 살 소년 조(에드 옥슨볼드)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아빠 제리(제이크 질렌할)와 엄마 자넷(캐리 멀리건)은 쾌활하고, 다정하고, 무엇보다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목한 가정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듯했던 그들의 평화는 제리가 일하던 골프장에서 해고되면서 서서히 부서진다.

 

부당하게 해고 통보를 받은 뒤, 고용인으로부터 다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은 제리는 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을 내쫓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대신 제리는 돈을 벌기 위해 산불 진화 작업을 하러 나선다. 자넷은 언제 끝난다는 기약도 없고,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을 하러 나선 제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조 역시 아빠가 위험한 일을 하러 가는 것을 원치 않지만 고집이 센 제리는 끝내 작업장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탄다.

 

자넷은 제리가 떠난 그 순간부터 이전의 화목한 가족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듯이 달라진 태도를 보인다. 제리를 향한 분노를 아들에게 전혀 숨기지 않고, 아빠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정말 아닐 거라고 자넷을 안심시키는 것은 조의 역할이다.

 

작지만 든든한 울타리 같았던 가족도 결국 서로 다른 세 사람이 모인 것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제리의 실직 이후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난다. 조는 상냥하고 친절한 부모의 역할을 버린 자넷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고, 그 욕망이 좌절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된다. 산불 진화 현장에서 돌아온 제리가 자넷이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남자의 집에 찾아가 방화를 시도할 때도 조는 바로 뒤에 있었다. 자신을 보호해야 할 존재들이 개인의 본능과 욕망에 휘둘리며 분노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모습은 조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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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부모의 세상이 변하면 아이의 세상도 변하는 게 당연하기에 열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조의 삶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의 삶은 멈추지 않는다. 조는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사진관에서 일을 시작한다. 제리와 자넷이 집을 비운 동안에도 조는 충실하게 일을 배운다. 제리와 자넷이 그랬듯 조도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개인의 영역을 점차 넓혀간다.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식을 소유물 취급하는 부모에게 저항하고 반발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자식의 모습은 자주 봤지만, 이렇게 고요하고 침착하게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아이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제리와 자넷은 대체 아들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항상 부모의 편이 되어줄 것 같은 착한 아들? 혼자서도 잘하는 어른스러운 아들? 사실 영화는 조가 제리와 자넷을 바라보는 시선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제리와 자넷에게 조가 어떤 의미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조가 가족사진을 찍자고 제안하고, 제리와 자넷은 능숙하게 카메라를 다루는 조를 조금은 어색하게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에서만 부모의 시선이 드러난다. 두 사람은 그들이 요란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오는 동안 조용히, 자신의 방법대로 성장하고 있었던 아들을 바라본다.

 

영화 속 조에게 변화는 산불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산불이 지나가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나무가 자라듯이, 조도 아주 느린 속도로 성장했을 것이다. 제리와 자넷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조의 마음속에는 아주 요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그런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존재이고, 결국 내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 누군가에게는 그 계기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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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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