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페터 한트케와 뒤늦게 알게 된 것들 [문학]

글 입력 2021.04.2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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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격하게 동의를 표한다. 지식의 습득은 다양한 종류의 유용성을 가져온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배우고 알아야 하는 본질적 이유가 단순히 물질적 유용을 창출하기 위해서, 혹은 사회적으로 근사한 위치를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종종 생각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 선과 악이나 종교적 통달,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 같은 거대한 것들만이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다. 작은 아픔과 한 명의 죽음도 우리의 세계에서 언제나 합당한 숙고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고 믿는다.

 

앎은 도덕적 삶과 결부되어 있다. 개인이 내릴 수 있는 도덕적 판단과도 연결된다. 타인의 고통에 무지한 채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진지한 차원의 숙려가 거의 불가능하다. 안다는 것은 때로 고통스럽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우리는 고뇌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수많은 딜레마를 겪고, 선택의 기로에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야 하는 작업에 놓인다. 몰랐다면 영원히 겪지 않아도 될 지난하고 음울한 작업 말이다. 그 작업은 분명히 고통스럽지만, 인간을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가치 있다.

 

나는 불합리한 상황을 목도했을 때, 가해하는 주체에 대항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라고 확신해왔다. 문제는 내가 부조리를 감각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눈과 귀를 더 활짝 열어 두어야 한다고 조금은 강박적으로 자신을 종용하는 편이었다. 만약 감각한다면—끔찍한 이슈들을 알게 되거나 도덕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핍박받은 이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제법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이렇다 할 권력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시민에 지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발언임을 안다. 나는 집단을 책임지는 원수가 아니고, 주목받는 유력자도 아니며, 그저 광활한 세계에서 극히 소수에게만 정체가 특정된 사람으로서, 텔레비전 앞에 옹송그린 채 개인적 견해를 떠들어댄다. 그러나 당연한 도덕적 정답이 있는 문제에 오답을 말하거나, 답하기를 망설이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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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의 일이다. 알라딘에서 페터 한트케의 책을 주문했다. 읽기만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포장을 풀고 읽기 시작했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작가 페터 한트케는 어쩌면 불명예스러운 논란으로 대중들에게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내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한트케에 대한 논란을 전혀 모른 채로 그의 글을 읽어 내렸을 때부터.

 

나는 한트케를 <관객모독>으로 처음 만났다.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작품인 이유를 읽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전위적인 작품을 감상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경외감을 느꼈다. 최근 주문해서 읽은 것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책을 한 겹 두르고 있는 책 띠지를 보니 순간 짧은 데자뷔(déjà vu)가 일었다. <관객모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손가락 사이를 까끌까끌하게 스치던 띠지가 떠오르며 익숙한 활자들이 교차했다. ‘2019 노벨문학상 수상자!’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문장이 주는 정보를 다시 한번 받아들였다. 명성 높은 훌륭한 작가군. 그렇게 속으로 읊조렸다. <관객모독>을 즐겁게 읽었던 탓도 있지만, 유명함과 훌륭함이 당연하게 비례할 거라는 꽤 순진한 생각을 했다. 사실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다.

 

책을 중간 즈음 읽었을 때였다. 좋았던 문장들을 타이핑하면서 읽을 정도로 책 내용에 매료된 상태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들이 넘쳐서 종이를 넘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생각을 글로 잘 갈무리해서 기고해야겠다는 짧은 결심이 섰다. 문득 작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인터넷에 검색을 시작했다. 한트케의 삶을 정리한 글을 가만히 읽어 내리다 한 단락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유고 내전 중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위시한 세르비아 정부가 자행한 ‘인종청소’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들이쉬는 공기가 갑자기 무거웠다. 나는 이어 밀로셰비치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뜬 단어들이 광폭하게 범람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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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셰비치는 1989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약 십 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20만 명에 육박하는 보스니아 및 알바니아계 무슬림 등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30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전범이다. 그가 저지른 참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방식으로도 절대로 재진술하고 싶지 않은 잔혹 행위들이 스크린 위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한트케가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서 직접 쓴 추도문을 읽었다는 문장을 쳐다봤다. 왜? 갑자기 토기가 치밀어서 책을 덮어 책상 한구석에 치워 두었다. 그의 문장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메모장도 닫았다. 나는 책의 남은 줄거리를 영원히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앎이라니.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본격적으로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의 반발과 논란들에 관한 기사를 속독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인들이 피켓을 든 채 시위하는 사진을 보았다. 몇 분 전 읽은 뉴스의 세밀한 묘사들이 시위자들의 얼굴 위로 조상의 비극을 씌우기 시작했다. 그쯤에는 사실 거의 지쳐 있었다. 클라이맥스는 스웨덴 왕립학술원이 낸 입장문이었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 및 미학적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 절차를 거쳤으며, 정치적인 상이 아니라는 말을 읽었을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이미 충분히 엉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최악으로 치닫지 않았다는 듯 끝도 없이 마음이 추락했다. 비슷한 역사를 겪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극단의 몰입 상태에 놓였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이토록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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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가지 사실로 괴로웠다. 첫 번째는 더 적극적이고 기민하게 정보를 살피지 못했다는 괴로움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한트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내가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해주어 고맙기도 했다. 그 덕분에 배신감은 더 컸다. 나는 잠깐이나마 성실하게 길러왔던 동경들을 마음속으로 하나씩 처형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문장들을 읽을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허망함과 혐오스러운 씁쓸함이 혀끝을 맴돌았다.

 

두 번째는 번복 없이 수여된 노벨상과 심사에 대한 분노였다. 짧은 생을 살면서 제노사이드가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가타부타한 설명이 필요 없이 진실임이 자명한 명제라고 여전히 믿는다.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따위의 기본적인, 암묵적인, 만국 공통의 상식이 존재함을 여전히 믿는다. 그러나 그 상식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가져올 거라는 것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술과 도덕의 경계를 완전히 분리하는 심사위원단의 입장문을 보며, 나는 치기 어린 탓에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아는 것은 분명 힘인데. 어쩌면 안다는 것은 외면할 힘일지도 모른다는 침통함에 젖었다.


때로 경계들을 무너트리는 것이 예술이 가진 하나의 기능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당돌함이 아니라 비윤리를 옹호하는 작가를 용인하는, 하나의 가해에 가까운 결정을 두고 예술이라고 지칭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모든 요소가 연결되는 세계에서 더 이상 절대론적 관점은 독존할 수 없다. 시대와 작가를 작품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현실과 종이는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작가에게 글은 곧 삶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의 문장들을 생각하면 급격하게 괴로워진다. 한트케의 글을 매력적으로 느꼈던 만큼,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 문장 사이에서 그저 무한한 말 줄임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한트케의 책을 다시 들춰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한트케의 책을 읽는 독자를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트케는 분명 매력적인 작가다. 그러나 오늘, 나는 기꺼이 세계 유수의 시상식에서 내린 결정을 인정할 수 없는 고집불통의 무지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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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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