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괜찮지 않은 시대의 괜찮을 위해 - 우투리 : 가공할 만한

비현실적으로 현실을 말하다
글 입력 2021.04.20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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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쿠데타 반대 시위, 홍콩 시위, 촛불 시위. 프랑스에선 혁명이 일어났고 일제강점기 때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정부(혹은 권력자)의 탄압은 언제나 존재했고, 거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도 늘 존재했다. 우투리는 시대와 무관하게 항상 존재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더 무겁게 다가온다.

 

우투리. 아기 장수 우투리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논밭을 갈면서,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아이를 달래면서 우투리를 찾는 노래를 불렀다. 어깨에 날개가 찢겨나간 것 같은 긴 흉터가 있는 우투리가 언젠가 이곳에 도달하여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너무나 옛날부터 불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사를 음미하지 않고 그저 부른다.

 

그런 세상에 삼이 태어난다. 삼. 숫자 3. 극에서는 삼을 아주 보통의, 평범한 존재라고 말한다. 어떤 한자의 의미를 찾아보니 삼에 이런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러저러한 비유의 뜻으로 쓰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삼. 앞뒤에 아무것도 붙지 않은 삼. 삼은 일이나 이, 사, 오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냥,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나 당신, 우리, 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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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이 태어난 도시도 그렇다. 1부터 5구역으로 나뉜 나라에서 그저 그런 3구역. 시멘트가 유행했을 때는 시멘트를 만드는 일을 했지만 유행이 지나고 나면 팔았던 시멘트를 두 배 이상 가격에 사야만 했기에 이 구역 사람들은 모두 시멘트 집에서 산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흰색 시멘트 집과 불순물이 많이 섞인 검은 시멘트 집이 따로 있지만 시멘트 집에서 사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구분이다.

 

가장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매일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도 그것을 일종의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무기를 소지했다간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정부를 위해 일하는 군인이며 그 가족을 위한 가게를 운영하며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처럼, 혹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와 그 어머니처럼 살아간다. 현실에 순응해서 그저 그런 삶을.

 

삼은 생각이 달랐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삶이 아니라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마을을 떠나고, 누구보다 마음에 맞는 친구 사를 만나게 된다. 사는 불안하고 겁이 나면 발작한다. 무엇이 불안하고 겁이 나냐고 물으면 불안하고 겁이 나는 것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는 그렇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웃는다. 발작할 때마다 아무도 날 해치지 않아,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하고 스스로 되뇌지만 어부가 작살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사회에서 그 다독임은 불가능한 희망에 가깝다. 사는 삼이 총기류를 만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한다.

 

삼은 더이상 사의 앞에서 총 도안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 궁금한 내일을 위한 이야기를 한다. 그저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그랬다. 삼이 유독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에 불만을 제기하고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도망쳤지만, 한곳에 잘 정착해 살고 있었다. 어떤 사건이 있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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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삼의 삶을 따라가는데, 후반부엔 정부에 저항하는 저항군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곳에서도 사람들끼리 첨예하게 대립한다. 저항군 내에서도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갈린다. 둘 다 흔히 보아온 말이며 양쪽 다 옳은 부분이 있다. 이런 갈등은 제3구역, 모든 건물이 시멘트로 지어진 3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선 긋기와 같다.

 

크리스털이나 대리석을 쓰는 1구역에선 시멘트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데 모두가 시멘트 건물에 사는 3구역에선 어떤 시멘트 건물에 사는지가 중요하다. 가해자인 정부는 신경 쓰지도 관심도 없는데 피해자인 저항군에게서만 인권과 도덕성을 놓고 토론을 하거나 갈등이 생긴다.

 

극에서 유일한 악역은 정부임에도 후반부에는 다른 사람이 더 두드러진다. 정말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정작 전혀 조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아이러니다.

 

저항군 대장 일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기아, 고통을 외면한다. 최대한 빨리 전쟁이 끝나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옳지 않은 길로 가고 있음에도 더 그를 막을 수 없자, 저항군인 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옳다. 우리는 바뀌지 않았다. 자기 세뇌다.

 

전쟁이 끝나기 위해선 둘 중 한 세력은 죽어야 한다. 지금 와서 되돌릴 수 없다면 우리가 옳다는 것을 되뇌는 게 더 편할 것이다. 결국 권력자가 바뀔 뿐 수탈당하는 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명분이 있어도 선이 없다는 건 그렇다. 참 어려운 문제다. 분명 바뀌어야 하기에 일어섰는데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희생 없는 변화는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 희생을 강요할지는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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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시피 극의 갈등은 단순히 정부군과 저항군으로 나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그보다 더 세밀하게 나누어졌다.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악한 행동이 선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모순적이다.

 

더는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지 않길 바란 삼의 행동은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사람들의 의미 없는 죽음을 만들었고, 결코 자신의 아버지처럼 폭력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는 무기를 통해 삼을 살린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일은 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희망을 주어 살리기도 한다.

 

저항군 대장을 마냥 옹호할 순 없다.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어가는 것을 막고자 무기고를 폭파한 삼의 선한 의지가 사람들을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내몰았다는 일의 주장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애초에 삼이 그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방어구를 만들자고 했을 때 거절한 것은 일이었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며 사람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 것도 일이었다. 일은 전쟁의 무게를 알고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개개인의 생명을 신경 쓰지 않는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희생하는 소’에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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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연출이 눈에 띈다. 무대 위에선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의 아버지가 폭행하는 장면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힘 있는 춤으로 대신하고 삼과 사가 정부군에 억압되는 장면에선 배우가 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공연, 미디어에서 가상의 이야기를 할 때 폭력을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강간, 살인, 폭행…….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핑계가 붙지만 자극적일 뿐이다. 때론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외면하게 된다. 이미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을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다. <우투리 ; 가공할만한>에선 그런 불필요한 적나라함을 빼버리고 공연 전 폭력 및 큰소리 관련 경고를 알려주면서 관객이 공포감을 느끼거나 불쾌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발작을 표현하는 면도 비슷하다. 발작 자체를 아름답거나 예쁘게 표현한다면 미화가 되겠지만 가볍게 표현한다면 희화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실제로 발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데 병의 어떤 지점을 소비하고 넘어간다면 당사자의 불쾌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감히 어떤 묘사는 좋고 어떤 묘사는 좋지 않다고 구분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가벼운 소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삼은 오늘을 정말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처럼 운이 좋은 날은 없을 거라고요."

 

"삼은 오늘을 정말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처럼 운이 좋은 날은 없을 거라고요. 그렇게 생각했고, 하나는 맞았습니다."

 

 
"괜찮아. 아무도 날 해치지 않아. 아무도 날 공격하지 않아. 난 괜찮아. 난 안전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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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선 비슷한 말의 반복이 자주 나온다. 앞서 A가 나왔다면 후반부는 A'로 변화를 주거나, A 그대로 말하는 식이다. 상황이 변하면서 같거나 비슷한 말은 관객에게 완전히 다른 인상을 준다. 앞서선 행복한 감정, 기대를 주었던 말이 뒤에선 슬프거나 아프다. 이런 대사의 변주는 관객이 공연에 더 몰입하게 하고 느끼는 감정을 극대화한다.

 

이런 요소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여공, 가정 폭력, 병 등 많은 현실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면서도 무겁지만은 않게 전달한다. 나레이션은 극의 전개를 빨리하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차분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하나의 작은 사회가 극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현실에 우투리는 없다. 삶이 힘들고 지치며 온갖 압박과 부조리에 시달리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와 모든 사람을 구해주고 이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은 없다. 오직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우투리의 존재를 갈망한다. 우투리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희망은 가공할 만한 힘을 가졌고, 내일을 궁금하게 만든다. 모두가 아는 우투리 이야기에 계시라는 단어가 붙는다. 사람들이 계시 아래 뭉쳐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가공하다

 

1. 두려워하거나 놀랄 만하다.

2. 원자재나 반제품을 인공적으로 처리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거나 제품의 질을 높이다.

3. 이유나 근거 없이 꾸며 내다.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나 상상으로 꾸며 내다.

 

 

그렇다. 우투리는 모두 뭉쳐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계기가 된다. 가히 가공할 만하다. 슬프게도 기쁘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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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아기장수 우투리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우투리가 갑옷이 될 콩을 볶아 달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콩을 볶아주다가 한 알이 튀어나오자 굶주림을 못 이기고 그것을 먹는다. 우투리 갑옷은 한 부분 비어있어 그곳에 화살을 맞고 만다. 우투리가 재정비하기 위해 뒷산 바위에서 3년을 기다리는 동안 우투리의 부모는 임금에게 협박당한다. 3년에서 딱 하루 남은 날, 어쩔 수 없이 뒷산 바위를 여는 법을 알려주면 우투리와 군사는 눈 녹듯 사라지고 오직 우투리가 타던 말만이 며칠 밤낮 울어댔다고 한다.

 

이러한 결말은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우투리가 미래에 우투리가 또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미약한 희망과 우투리가 현실에 없다는 비관적 순응이 같이 드러난다. 단지 한 순간이라도 희망을 보고 수탈하는 정부에게 통쾌함을 맛보았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극이 끝나갈 무렵 결말이 궁금해졌다. 비극적으로 끝난다면 지금껏 쌓아 올린 이야기가 무의미해질 것 같고 희망차게 끝난다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극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사람에 따라 어떤 결말이 되어도 좋으며 결말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직 단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게 끝이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설화 속 우투리가 하나의 희망으로 남았듯이.

 

극의 모든 부분이 인상적이라 차마 글에 다 녹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각오한 걸 알면서도 떠나는 걸 보는 이의 말과 행동,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의미없는 존재는 없다는 오의 말. 곱씹어보지 않아도 장면장면이 머릿속에서 흘러나와 아프다. 그들이 정말 행복한 세상이 올 수 있기를 바라게 되고, 나아가 지금 우투리를 바라는 모든 나라,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니 가히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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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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