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너짐의 미학, '관통'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4.1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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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세상을 이분화해서 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사 온 집의 냉장고 소리가 유난히 커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적에는 세상은 냉장고 안과 밖으로 나눠져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소음이 시작된 곳과, 전파되는 곳으로. 모든 결정권을 쥔 세상에서 그렇지 못한 세상으로 하달되는 소음이라고. 생각은 거기까지 확장되곤 했다.

 

또 한 번은 선물 받은 스노우볼 안에 사람 모형이 너무 정교해서, 세상이 꼭 그 작은 구 안과 밖으로 나눠져 있는 듯 싶었다. 그들의 세계는 마치 신이 되어 지름 6cm의 지구를 내려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가볍게는 학교와 집, 내 방과 거실, 나아가서는 나와 타인, 병원과 무덤 등… 마치 마트 계산대에서 물건들 사이에 내키는 대로 상품 분리바를 내려놓듯, 나는 쉽게도 세상을 나누고 분절했다. 이것은 아주 편리한 분류법인 동시에 안정감을 주는 사고 체계였다. 어쩌면 우물 안과 밖뿐 모르는 개구리처럼 안일했지만, 그 덕에 유년은 비교적 축축하고도 따뜻했다.

 

한 가지 나를 괴롭힌 것은, 내가 벽을 세우는 것에 지나치게 능숙해졌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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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 1967, 캔버스에 아크릴릭, 242.5x243.9cm

 

 

처음 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런 내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예전에 회화를 관람할 때 세상은 캔버스 안과 밖 뿐이라고 느꼈다. 캔버스 안의 풍경은 그만의 시공간을 유지하며 흘러갔고, 그 너머의 나 역시 나만의 흐름이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캔버스 안 세상을 공부하듯 익혔을 뿐, 두 세계가 어느 지점에서 겹쳐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걸 이분화하던 내 머릿 속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린 건 데이비드 호크니였다.

 

그의 대표작인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를 실제로 본 이들은 누구나 물방울의 생생한 찬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튄 물을 닦으려 손등으로 볼을 쓸게 될 지도 모른다. 물과 친하지 않은 나인데도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저 저 다이빙 대 아래로 수몰하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림을 보는 관찰자 입장의 나는 분명 캔버스 밖의 존재일 텐데도 두 세계 모두가 한 순간에 체험 가능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구병모 작가의 소설, '관통'을 접한 후 이것은 나만이 겪는 환상이 아님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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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단편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 수록된 작품 「관통」에는 찢겨진 캔버스 사이로 관통하는 '미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책 표지에서 이 작품을 엿볼 수 있다. 샛노란 배경에 세로로 길게 그어진 균열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얇은 균열 안 쪽을 잘 살펴보면, 마치 블랙홀처럼 무한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실제로 루초 폰타나의 공간 개념 작품들은 캔버스를 찢었다는 전위적인 행위로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캔버스 안의 세상과 그 밖의 세상을 공고히 하던 벽을 무너트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유모차를 끌고 홍대 거리를 걷던 어느 날, 루초 폰타나의 공간 개념을 어설프게 따라한 모작을 마주한 미온은 순간 그를 관통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캔버스에 길게 찢긴 자국은 계속해서 미온을 잡아 끈다. 상식적으로 손을 넣어 봤자 질긴 캔버스 가죽에 닿을 것임을 알지만서도, 미온은 무언가에 이끌리 듯 신체 일부를 얇게 열린 공간 속으로 집어 넣는다.

 

소설 속 미온의 현실은 정신병을 앓는 시누이와 사업으로 돈을 죄다 날리고 잠적한 남편, 영양실조 직전 상태인 아이와 낡은 유모차 뿐이지만, 그 균열을 '관통'하는 순간 생생한 젊음을 얻는다. 가벼운 원피스와 보스턴 백을 두르고 홍대 거리를 가로지르며 유명 화실로 향하는 그는 미온이 바랐던 그 자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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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캔버스 이전과 너머의 세상은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저 잠시 관통할 길이 생겼을 뿐이다. 작가는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이 소설의 놀랍고도 씁쓸한 지점은 미온이 훌훌 털어버린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비참한 생활뿐이 아니라, 세상이라고는 엄마인 미온이 전부였던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두 세계가 관통 가능한 것임을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유기된다.

 

작품 앞에 홀로 남은 낡은 유모차는 한참을 방치되어 있다 시민들에 의해 경찰에게 넘어간다. 이들은 도박이나 게임 중독에 빠져 아이를 방치하는 한심한 부모의 아기일 것이라 확신하며 혀를 찬다. 캔버스 이전의 세계에는 여전히 재난이 현존한다. 아이는 미온이 제공한 대가가 되어 버렸다.

 

캔버스를 완전히 부숴 버릴 수는 없다. 그 바리케이드마저 칠 수 없다면, 작은 몸으로 삶의 무게에 억눌리는 사람들은 그 어떤 세상에서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안정망은 필요하지 않나. 그런데 그 울타리를 누구를 위한 것인가? 캔버스 안의 사람들? 혹은 밖의 사람들?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버릇처럼 해오던 '세상 이분화 하기'는 어쩌면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였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온처럼 관통만으로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사계절 내내 꽃이 피고 샘이 마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보장된다면 나는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세상과 그 현실을 너무 쉽게 버리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관통하기 이전의 세상은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현실적인 재난들을 품에 안고. 난 그곳에서 도망치는 것뿐이다. 마치 내가 바라보던 회화 속 시간이 그랬고, 끊임없이 소음을 만들어 내던 냉장고 안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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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작품 세계는 항상 놀랍도록 치밀하다. 현실과 환상 두 영역을 모두 놓지 않은 채 이들이 마구 뒤섞인 세계를 보여주다가도, 동시에 무섭도록 이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세상의 사각지대를 그대로 비춰 묘사한다는 점도 또 다른 매력이다. 작가 특유의 만연체는 이 이야기들이 마치 강줄기처럼 연속적인 시공간 내에서 흘러가는 일임을 실감하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나누기만 했을 뿐, 그 속을 관통할 길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던 나에게는 확실히 신선한 작품이었다. 중요한 것은 캔버스 너머의 세계와 이전의 세계를 모두 '인식'하고, 의지만 있다면 어떤 세계에서든 몸 담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는 순간 시야는 더욱 넓어지고,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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