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양한 삶의 단편들, 141.2km의 선물 [다큐]

사라지는 동해 남부선을 바라보며
글 입력 2021.04.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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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렸을 때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종종 보곤 했다. 느리고 잔잔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잠에 든 적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가 주는, 다른 방송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감성은 내게 많은 힐링이 되었다.

 

자연물 다큐멘터리는 내게 자연물 사진 작가의 꿈을 심어주었고 우주 다큐멘터리는 크나큰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으며 여행 다큐멘터리는 집 밖으로 잘 안나가는 나에게 미지의 곳을 탐험하는 즐거움과 짜릿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꽤 많은 다큐를 봤지만 그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다큐는 단 하나로, 2013년 7월 28일 방영된 KBS 다큐 3일,'141.2km의 선물 - 동해남부선 72시간'이다.

 

동해남부선은 1935년 개통되어 선로가 하나 뿐인 단선 선로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가 2013년 12월 2일 복선 선로로 변경됨과 동시에 다른 곳으로 선로가 이설 되는 바람에 기존 철길은 폐선 절차를 밟게 되었다. 다큐 3일 '141.2km의 선물 - 동해 남부선 72시간'은 폐선될 예정인 기존 선로를 따라 3일간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보자.

 

 

 

"20년 전에는 여기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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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역 앞이 붐볐던 시절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활기차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20년 전에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극장, 쇼, 서커스 등등 지금과는 달리 재미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듯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주변 상가와 집들에는 적막함만이 감돈다. 조용하고 평화로워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쓸쓸함과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차 있다.

 

아마 폐선이 되고 역이 사라지게 되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인걸 알지만서도 마음 한 구석이 쓰린 것은 그만큼 여기에 정이 많이 쌓였기 때문이리라.

 

 

 

"잃어버리는 것은 기억하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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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라지는 역을 지키는 역장이 있다.

 

그는 '당장 사라지는 역에서 꽃을 심고 가꾸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위와 같은 대답을 한다. 현재의 노력이 나중엔 모두 쓸모없어 지는데도 그는 태연히 오늘의 할 일을 한다.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역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탈 없이 돌아가게 해주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 그것이 그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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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새로 생기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는 사라지기 마련. 사라져가는 것의 마지막을 지키는 그는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기억'하면 된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추억 속에 영원히 남을테다.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걸 찾는 방황을 끝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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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끝이 다른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자전거 여행을 다니는 영미씨가 그 주인공이다. 사라지는 폐선 구간의 경치를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있을까? 그녀에게 자전거 여행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기차? 못타요. 눈으로 구경은 해도 사람은 탈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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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사라진 역사 근처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들을 만났다.

 

더이상 열차가 멈추지 않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 연세가 많으셔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할머니들은 이젠 열차 오는 소리만 들어도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알 정도로 열차 소리가 귀에 익으셨다고 한다.

 

기차가 멈추지 않는 역에 앉아 탈 수 없는 기차를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음이 서려있다.

 

 

 

"자투리 시간에 조금이라도 공부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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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일상인 사람들도 있다. 출퇴근 용도로 기차를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기차는 '남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득이 되길 바란다.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나 또한 의지가 불타오른다. 이건 기차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남들로부터 나쁜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장점, 본받을 점을 적극적으로 내게 반영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런 자세를 취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높이 올라설 수 있을까?

 

 

 

"남들이 말하는 기차 낭만 여행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아요.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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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치이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많은 것 같다.

 

워라벨이 점차 중요한 직장의 요건으로 떠오르고 있고 주 52시간이 대기업을 넘어 중소기업까지 적용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근로시간이 TOP 3안에 꼽히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나라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여유', '낭만', '가족들과의 시간'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돈을 벌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인데, 지금의 우리는 행복을 담보 삼아 돈을 벌려고 한다. 돈이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는 없는걸까?

 

 

 

"시멘트 사이 한 포기 잡초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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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근처에서 오랜기간 농기구를 만들어온 병오씨는 살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잡초의 모습을 보고 삶의 기운을 얻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야하고 반복되는 일의 지겨움을 견뎌내야 한다. 멈추고 싶을 때, 그만두고 싶을 때, 도망가고 싶을 때 잠깐 불어오는 마음을 붙잡아 두는 것, 그 끈기와 인내가 바로 장인을 만드는 것일테다.

 

 

 

사라지는 간이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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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동해 남부선을 여행하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긴 여정 동안 우리는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보아왔고 그들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 마음 속에 품은 각자의 열차는 기차선이 없어지고 주위 환경이 바뀌더라도 꾸준히 유지될 것이다. 놓여진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며 달리는 것이기에, 오늘도 우린 열심히 우리만의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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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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