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누군가의 가족이다 [영화]

나의 모든 가족들에게
글 입력 2021.04.0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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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 피는 못 속인다. 모두 가족과 관련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족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족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부부를 중심으로 그 근친인 혈연자가 주거를 같이하는 생활공동체’라고 정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앞선 속담들처럼 ‘혈연관계’가 중심이 된다는 말이다. 오늘은 영화 ‘나이브스 아웃’을 통해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이브스 아웃


 

나이브스 아웃 대표 사진.jpg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개봉한 미스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인 할런 트롬비가 85세 생일에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면서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할런의 가족들을 심문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할런의 가족은 할런의 어머니, 할런의 자식 가족들이 함께 대저택에 사는 대가족이었다.


나이브스 아웃은 탐정 브누아 블랑이 해당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함께 하므로 추리 장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연출이나 극본도 매우 훌륭한 영화여서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만 참도록 하겠다. 이어질 내용에서도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는 일절 담지 않았으니 꼭 한 번 영화를 보기를 바란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왜 나이브스 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용이 아닌 ‘가족’을 주제로 잡았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첫 번째는 혼자 영화관에서 손에 땀을 쥐며 봤고, 두 번째는 (공교롭게도) 가족과 함께 노트북으로 감상했다. 두 번째에는 내용을 알고 보니 첫 번째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트롬비 가족들이었다.


트롬비 대저택엔 대가족이 산다고 했다. 할런 트롬비와 그의 어머니, 첫째 린다와 그의 남편, 그의 아들 랜섬, 막내 윌터, 그의 아내와 아들, 며느리 조니와 그의 딸까지 대가족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가정부 프랜과 할런의 간병인 마르타까지 대저택은 그야말로 복작복작하다. 아니, 복작복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첫째 린다는 부동산 사업에 성공했고, 막내 윌터는 아버지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며느리 조니도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다. 또한 할런의 85세 생일 파티에도 함께 참여하는 모습이 그들을 화목한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초반까지는 말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나이브스 아웃 가족 사진.jpg

 

 

콩을 심어 콩을 수확할 수는 있어도 아무래도 할런 심은 데 할런이 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할런의 가족들은 까보면 모두 속 빈 강정들이다. 화려해 보이는 자수성가형 CEO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들 할런의 재력에 기대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무능력함을 근거로 트롬비 가족을 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위선에 근거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 같은’ 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할런의 간병인 마르타를 소개할 때 나오는 말이다. 할런의 가족들은 마르타를 가족 같은 아이라고 소개하며, 나중에는 가족 같은 마르타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건 다 기만이고 위선이었다. 가족 같다는 이민자 마르타 앞에서 그들은 서슴없이 이주자들의 이야기를 한다. 옹호하는 입장이건, 비난하는 입장이건 마르타가 들어서 유쾌할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마르타를 끌고 와 그에게 의견을 묻는 다소 무례한 언사까지 일삼는다. 마르타를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는 없다.


재정적 지원 역시 그들의 위선이었음이 드러난다. 유산 문제가 얽히자 그들은 바로 마르타에게서 등을 돌린다. 마르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손녀 메그까지도 말이다. 가족 같다는 마르타는 어디까지나 가족 ‘같은’ 거지 진짜 가족이 될 수는 없었던 셈이다.


사실 세상에는 트롬비 가족같이 위선을 가족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 같은 회사.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되시겠다. 가족이면 가족인 거지, 같은 건 뭔가. 가족같이 친밀하게 지내면서 스스럼없이 뭔가를 시키고 싶지만, 진짜 가족에게 필요한 애틋함은 빼겠다는 것 아닌가. 가족 같다면서 뭐든 해줄 것처럼 굴다가 그를 위해 자기가 손해 보기는 싫은 것 아닌가. 철저히 자기중심적 사고가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럼 트롬비 가족들이 자기들끼리라도 화목하게 지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탐정 브누아 블랑이 가족들을 심문할 때, 그들은 서로를 헐뜯기 바쁘다. 가족 구성원 모두 하나같이 똑같다. 서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정치사상도 마음에 들지 않고, 서로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무턱대고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돈 문제가 얽히니까 가족끼리 꽁꽁 뭉친다. 손자 랜섬은 정말 망나니로 등장해서 모든 가족들에게 엿이나 먹으라는 명대사를 남기는데, 그 랜섬조차 돈 앞에서 ‘우리는 가족’ 이라며 난데없는 가족 대통합을 펼친다. 이쯤 되면 혈연으로 뭉친 게 아니라 돈으로 뭉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할런에게는 트롬비 가족보다 마르타가 더 가까운 가족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묘사하는 친구 같은 간병인이 아닌, 진짜 가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진짜 가족들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럼 이들은 가족이라는 말에 묶일 수 없는 걸까?

 

 


가까운 남이 먼 일가보다 낫다


 

나이브스 아웃 사진.jpg

 

 

요즘 뜨거운 감자로 올라서는 사회 주제 역시 가족이 아닐까 싶다. 사실 최근은 아니고, 생활 동반자 법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족의 형태는 달라지고 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는 단순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혈연이나 혼인으로 묶이지 않은 형태의 가족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 형태는 정말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마음이 맞고, 생활 방식이 맞는 친구들끼리 서로를 돌보며 가족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여생이 남은 고령자가 혼인을 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도 있고, 동성 간의 사랑으로 가족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법은 아직도 다양한 가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남인 사람들은 가족이 될 수 없다. 이건 격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도태된 법률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비혼을 생각하고, 또 실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비혼주의자들 뿐 아니라 성 소수자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제약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성 부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실제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 관계에만 있던 부부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남편이 사망하자 법적 가족이 아니란 이유로 아내에게 장례 주관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아내는 남편의 형제가 시신 인수를 포기한 후에야 장례 주관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현존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법이 규정하는 전통적인 사전적 의미의 가족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 혈연은 가족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가족을 이루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 있고, 자의적으로 만들 수 없는 애틋함의 근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혈연이 가족의 모든 것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혈연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을 다시 보자. 트롬비 가족은 분명 하나의 가족이다. 그렇기에 할런도 개차반인 가족 구성원에 애틋함을 가졌고, 그들의 성장을 도왔으며, 그들이 진심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랐다. 그건 변하지 않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또 다른 가족이 존재한다. 마르타와 할런. 이민자 마르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할런이었고, 할런이 속마음을 전부 터놓을 수 있는 사람 역시 마르타였다. 이들이 가진 유대 관계가 단순히 우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분명 서로에게 따뜻한 가족이었다.


가족. 분명 아름다운 단어이다. 나도 가족이라는 단어 안에서 안온함과 행복을 느끼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포용할 수 있는 범위이다. 이 단어가 또 다른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가족들이 인정받고, 수용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혈연관계가 아닌 형태의 가족들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는 것이 가족이다.

다른 설명과 조건이 필요한가?

 

 

 

황시연.jpg

 

 

[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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