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끊어진 굴레와 굳건한 자국 - 보이지 않는 것들

글 입력 2021.03.31 15:2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평면.jpg

 

 

독자들은 푸르고 어두운 책 표지를 보며 잔잔한 기대감을 품고 책이 내뱉을 첫 마디를 맞이한다. 저 너머 육지에서 사는 목사 요하네트 맘베르게트가 바뢰이 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는 순간, 독자들은 바뢰이 가족의 고립된 여정에 함께하게 된다.

 

사람들의 소음보다 한적한 자연의 소리가 자욱하게 깔린 작은 동네들이 으레 그렇듯, 작고 외로운 바뢰이 섬도 고요하고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니, 어쩌면 살아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족과 동물들만 사는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죄다 자연의 뜻대로만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이 책이 소리가 되어 데시벨을 잰다면, 측정기가 그려내는 그래프는 무척 재미없을 것이다. 일정한 구간만을 왕복하며 가끔 삐죽 튀어나오는 모난 부분조차도 누군가를 찔러 다치게 할 만큼 위협적이진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섬처럼 도시의 자극과 매움을 닮지 못하고 담백하게 사람들과 섬의 생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뢰이 가의 인생이 평탄하냐고 묻노라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비극보다 자연이 하사하는 체벌이 훨씬 피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석 달이 더 지났다. 서리와 눈보라와 악마의 달이. 그리고 이상하게도 새로운 희망이 가족들을 감쌌다. 희망은 검은 하늘에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1월 초에는 멍든 눈 같다가 2월이 되자 벌겋게 변했고 마침내 하늘이 밝아져 분화구 같아졌다.

 

이는 결국 섬의 희망으로 바뀌었다. 가장이 어구와 물고기 판 돈을 받아서 돌아올 거라고 말이다.

 

 

식량이나 물이 고갈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그에 내몰려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고 가슴에 묻어 평생 죄책감을 달고 살기도 한다. 신원도 알 수 없는 외부의 침입과 섬의 순박함을 이용하려 드는 본토의 이기심을 대비해야 하고, 그걸로 성에 차지 않은 자연이 제 가족들을 빼앗아 가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섬에서 주어진 삶을 이어가는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막막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들을 나약하다고 평할 수 없는 이유는 운명을 벗어던지고 섬을 버리지 않는 끈질긴 애향심과 그 마음을 기반으로 더욱 나아가려는 지독한 꿈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고립 속에서도 안개는 언젠가 걷힐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나 품고 살았다.


책이 인생을 다루는 지점에서 좋았던 점은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이 다른 이의 각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자연과 운명이 허락한 만큼을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 갔을 뿐이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더 안타깝고 먹먹하게 마음을 적시지만, 적어도 그들의 죽음에 잇따르는 의문과 불만이 없어서 그저 조용히 추모하고 고되게 살다간 그들을 겸허히 보내줄 수 있었다.

 

먼저 떠난 이들을 보내는 사람들의 충분한 슬픔과 충동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그와 별개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바브로가 어릴 때 바뢰이섬의 여자들은 의자가 없었다. 가족들은 테이블 앞에 서서 밥을 먹었다. 집안 여자 중 유일하게 어머니인 카야만 의자에 앉았으나 그것도 첫아들을 낳은 뒤였다.

 

잉그리드가 세 살 때 한스가 딸의 의자를 만들어 주었고 제대로 앉을 만큼 클 때까지는 팔걸이에 앉아 좌석이 발을 올렸다.

 

한시대가 그렇게 저물었다.

 

 

한 가족만이 대를 이어오는 아주 작은 마을에도 나름의 규율이 있고 제한이 있다. 대개 그런 제한은 여자에게 더 많았는데, 모두가 달라붙어 일구어내도 바쁠 섬에서조차 여자는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들이 정해져 있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뿌리를 만들었거나 혹은 그대로 이어받았을 마틴은 아들을 낳고 나서야 겨우 제 아내를 의자에 앉아 쉬게 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섬을 살아왔다. 고기를 잡고, 가축을 기르고 필요할 때만 섬을 나서 되는 만큼만 구해오는 삶을 말이다.


그렇게 태어난 한스는 노선을 비껴가지 않으면서도 제 딸 잉그리드에게 의자 하나쯤은 선물하는 아량을 베푼다. 그가 딸을 위해 바친 사랑처럼 한스는 마틴과 다른 꿈이 있었다. 부두를 짓고, 큰 배를 갖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추측건대, 한스가 바라는 다름은 그동안의 그의 삶을 부정하는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롭고 조금 더 풍족한 것, 현실과 타협 가능한 정도의 욕심이었을 테다.


전통의 대를 끊고 올라선 잉그리드는 정말 다른 세상을 꿈꿨다. 현실을 배우고, 계산하고, 계획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군 부두를 시작으로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히고 싶어했다. 그 욕망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잉그리드는 똑똑했고, 감성이 풍부했다.

 

 

그녀는 느리지만 공들여 창문을 칠했다. 바뢰이의 집을 칠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단순히 집을 바꿀 뿐 아니라 바위와 모래와 풀과 동물과 나무가 있는 섬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과도 같았다. 가족들은 칠을 마치고 곧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쨌든 그들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가족들은 저녁에 들로 나가 몸을 돌려서 집을 쳐다보며 저곳이 우리가 사는 집이라고 감탄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도 가장 먼저 그렇게 했다. 밖으로 나가 집을 쳐다보고 그 모습을 통해 기운과 희망을 얻고 이전과 다른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잉그리드가 이끌어 갈 바뢰이 섬에는 바뢰이 가의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자식으로 품었던 순간을 기점으로, 앞으로도 바뢰이 가의 피는 점차 옅어질 테다. 그러나 순수 바뢰이의 피를 이어받은 마지막 자손인 잉그리드는 그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내려져 오는 부계 중심 사회와 이상적인 가족을 구분짓는 악습들이 책 속에서 해체되는 순간, 필자는 간접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island-2482200_640.jpg

 

 

그들의 이야기는 느리다. 그만큼 그들의 성취와 결론은 천천히 단정 지어진다.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지만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잉그리드는 섬을 변화시킬 것이다. 가족들도 이에 기꺼이 동참할 테다. 바뀌어가는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들은 가족이 되었고, 그들만의 섬을 가졌다. 테두리가 분명한 바뢰이 가족과 바뢰의 섬은 앞으로 어떤 파도가 덮쳐도 자국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오수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5.01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