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바닥의 생(生) [문학]

글 입력 2021.03.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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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양희, <새가 있던 자리>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부서진 기둥(The Broken Column)>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천양희의 시를 읽었다. 학창 시절 몇 번이나 읽고 분석했던 작품이다. 고통의 팔 할은 공부가 근원이던 때였다. 고삐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어른을 꿈꿨다. 어리숙한 생각이다. 자라고 나니 나를 바닥에 누워있도록 하는 이유가 더 많이 생겼다. 밤과 폭풍은 자주 찾아오고 오늘도 나는 추워서 외투를 더 두껍게 껴입는다. 한여름에도 나는 추위를 탄다. 물론 신체적 현상과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여전히, 바람 속에서 쉴 수 있을 만큼 가볍거나 자유롭지 못하다. 다른 것들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삶을 무겁게 만든다고 느낀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좌절 모두 나의 탓임이 자명하다고 일기에 적는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절에는 재능 부족을 한탄하거나 나태함에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았다. 지금은 손에 쥘 수 없는 불가의 영역을 향해 무기력함을 표출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너무 많은 마음을 건다. 꿈과 관계와 내일에. 너무 이상적인 순간들은 상상하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상의 생물이 공중의 삶을 꿈꾸는 것처럼 허황하게 들린다. 로코코식 허구가 머릿속에 부드럽게 펼쳐진다. 그럴 경우 징계는 상상자(想像子)인 나의 몫이다.

 

창공의 새는 나와 다르다. 그들에게 비상은 망상이 아니라 일상이다. 순간 부러움이 다시금 높이 치밀어 자꾸 위를 바라보게 된다. 나는 그저 날기를 바랄 뿐이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131.jpg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La Columna Rota), 1944, 캔버스에 유채, 40x30.7cm, 돌로레스 올메도 컬렉션

 

 

프리다 칼로를 좋아한다. 그녀의 작품은 캔버스 위 회화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거울같이 느껴진다. 부서진 기둥은 내 안에도 있다. 나를 종단면으로 잘라 놓은 해부도를 마주한다. 칼로의 표정을 거울처럼 비춘다. 칼로의 살을 읽는다. 칼로 안의 조각난 기둥들을 더듬는다. 살피는 눈짓 한 번마다 뼈가 한 조각씩 동강 난다.

 

보편화된 고통의 형상은 마치 지시대명사처럼 내 절망의 이름을 대신한다. 미뤄둔 숙제를 급하게 하는 학생처럼,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실패한 기억을 하나씩 대입한다. 경전을 앞에 두고 감히 시시콜콜한 텍스트를 읊어대는 꼴이다.

 

바닥에 부딪히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나 역시 성취에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지새운 새벽들이 언젠가는 편안한 잠을 가져다줄 거라 믿는다. 그러나 온갖 해묵은 상념과 악한 상상을 과식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이상을 꿈꾸는 일에 재주가 있는 사람은 최악을 그리는 것에도 능숙하기 때문이다.

 

밥이 아직 익지 않았는데 불을 껐다. 설익은 쌀알을 씹으며 생각한다. 무르익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상이 신화일 뿐이라면 어떻게 하나. 지상에서 발을 뗄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지상에 있나 지하에 있나.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출구 없는 곳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잠식된 적이 있었다. 가능성이 없는 답을 적어 내리며 미래를 창작한 적도 많았다. 종점이 없는 무정차 버스를 탄 기분이었다. 묵묵함은 어느새 무감함이 된다. 시정거리를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 익숙해진다. 지친다고 말하는 일에만 유일하게 지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언제나 아직과 다음을 속삭인다.

 

칼로의 자화상을 다시 들여다본다. 폐허 위에 축조된 삶을 마주한다. 살은 아물거나 덮이지 않았다. 그러나 칼로는 여전히 곧게 서서 앞을 응시한다. 크레바스처럼 깊게 벌어진 상처에서는 깊이가 느껴진다. 재봉하지 않은 틈 사이로 비치는 강인함이 경이롭다. 그 안에 축적된 좌절의 질량은 얼마나 되며 이를 극복해낸 힘은 얼마나 강렬한가.

 

쇠약한 목소리로 외친다. 모든 삶은 트라우마와 동행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견디는 일에는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테다. 세계가 급변해도 나는 여느 때처럼 미숙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그림 속 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살아있다.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넘어져도 성실하게 일어나는 그 독기는 죽어가는 다른 생을 살리는 영감이 된다. 숨이 꺼진 몸에도 다시 온기를 불러올 수 있을 만큼 뜨겁다. 그렇게 미숙함 속에서도 생을 견딘 자가 눈앞에 있다. 그녀라고 일어나는 법이 쉬웠겠나?

 

흔들림 없는 눈과 다부진 입매가 내게 용기를 준다. 장렬히 쓰러져도 또 다른 시작을 갈구하며 일어나라고, 비상을 향한 자신의 지독한 갈증을 닮아가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몸을 보라고 종용한다. 바닥 없이는 비상도 없다. 새삼스러운 진실을 고백한다.

 

이슬아의 말처럼,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나의 생은 필멸해도 좌절과 극복은 반복되며 불멸할 것이다. 경멸하던 바닥에서 치솟아 올라 잎사귀를 만난다 해도 더 높은 고도를 꿈꿀 것이다. 새로운 바닥을 감각하고 또다시 더 먼 대기에 다다르려 퍼덕일 것이다. 요행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저주하면서도 열렬히 생의 바퀴를 굴릴 것이다.

 

그리하여 황소윤의 노래처럼,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로 갈 것이다. 새벽은 결국 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

 


오 그대여 부서지지마

바람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마

이리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 새소년, <난춘(亂春)>

 

 

[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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