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짧은 호흡 [사람]

수습 기간을 마치는 뒷심 부족한 나에게
글 입력 2021.03.13 07: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library-849797_640.jpg

 


망했다. 수강 신청이 망했다. 100번 대로 들어갔음에도 마우스 버튼 하나를 잘못 눌러 1600번 대로 밀리고 말았다. 너무 당황스러우면 사람이 초연해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멍하니 ‘1600’ 이라는 숫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 저녁엔 노트북이 납치당했다. 랜섬웨어에 걸려 모든 파일에 락이 걸리고, 남아있는 파일은 돈을 요구하는 메모장 하나였다. 이도 저도 못한 나는 결국 노트북 포맷 버튼을 눌렀다. 어이가 없어서 눈물도 안 나왔다. 16일의 화요일. 절대 잊지 못할 날이다.


악몽과도 같은 한달을 보냈다. 수강 신청은 망했고, 파일은 모조리 날아갔으며 기대를 걸었던 인턴도 자꾸 면접에서 떨어졌다. 처음 새 학기를 준비하며 열의에 불타올랐던 나는 어디 가고, 남은 생각은 ‘휴학’뿐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하던 웹소설도 공지를 올리고 멈추었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크기변환]girl-5230306_1920.jpg

 


열심히 달려보려던 마음이 전부 사라지고, 극도의 우울감에 빠진 나는 집 밖을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강 신청도, 인턴도, 컴퓨터도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 없이 2월을 그렇게 보냈다. 작년 겨울엔 토플도 원하는 점수를 받으면서 열심히 지냈던 거 같은데. 나 지금 뭐하는 걸까.

 

그 와중에 나의 글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글의 호흡이 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숨을 조금 짧게 쉬어보기로 했다. 길게 나열되던 문제점들을 토막 내고, 차근차근 짧게 정리하는 것이다.

 

 

 

숨 들이마시기


 

일단 컴퓨터. 모든 파일이 살아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 저기 주고 받았던 메일을 뒤져 날아갔던 포트폴리오를 조금씩 찾아냈다. 100% 복구는 아니지만 이정도로 만족이다. 솔직해지자. 사실 만족은 아니다. 공모전을 위해 쓰던 글이 다 날아갔고,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 인턴. 이건 나 자신과 합의를 봤다. 당장 휴학을 위한 도피처로 인턴을 선택하는 것 대신, 차라리 경험을 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직 인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한 달 전 보다는 충분히 나아진 상태이다. 여유를 조금 가진 것이다.

 

가장 문제인 수강신청. 이 문제는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수강 신청을 망하기 전까지, 나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대학교 조기 졸업. 조금이라도 일찍 졸업하기 위해 열심히 갈고 닦아온 내 성적이 물거품이 되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에 열중하면 그것만 바라봐야 하는 성격상 목표가 어긋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우울감에 빠져 살았다. 당장 무언가를 해야 되는데, 마음이 학교로부터 붕 떠버린 상태에서 도무지 무얼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은 탓이었다.

 

 

 

숨 내쉬기


 

[크기변환]cafe-768771_1920.jpg

 

 

최근 두 명의 친구를 만났다. 방에 박혀 땅굴만 파고 들어가던 찰나였기에 친구들과의 만남은 즐겁기만 했다. ‘대학생’이라는 틀 안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당장에 집중하는 친구들이었기에 고민을 털어놓기만 해도 속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망해버린 수강 신청을 수습하긴 했지만 마음이 훌쩍 떠버린 상태였다. 여기서 꾹 참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잠시 쉬어가야하나 고민이 많았다. 바라던 영상 과목은 하나, 나머지는 모두 원치 않은 경영 과목이었다. 경영 수업만 생각하면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이러다 보니 문제는 점점 깊어졌다. 나는 과연 경영 복전(복수 전공)을 왜 했는가. 취업을 위해서? 하지만 인턴 면접에서는 나의 경영 복전은 쳐다보지도 않던데. 오히려 무슨 툴을 다룰 줄 아는지, 인사이트는 어디서 얻는지를 더 궁금해하던데.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경영 복전을 포기하자니 너무 아까웠다. 남들 다 하는데. 이게 일 순위 이유였다. 그리고 취업에 필요하다는데. 이게 두 번째 이유였다. 없는 것 보단 있는게 낫잖아? 이게 전체적인 이유였다.

 

 

 

숨 고르기


 

이 상태로 가다간 성적과 쉼 모두를 잃을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조금 고생하고 성적을 잘 받아서 목표한 대로 조기 졸업을 하든지, 아니면 잠시 쉬어가며 환기하는 대신 조기 졸업을 조금 늦게 하든지. 인생 최대의 난제였다. 수업을 듣는 중간에도 휴학 생각이 마구잡이로 치고 올라왔다. 어려웠다.

 

휴학하면 뭐 할 건데? 이 물음에 대한 엉성한 계획도 조금 있다. 일단 까먹은 독일어를 다시 공부 할 거고, 자격증을 딸 거야. 영상 공부를 조금 더 깊게 할 거고, 영상 찍으러 많이 다닐 거야. 그리고 쉴 거야. 그냥 쉴 거야.

 

1, 2 학년 때 불타올랐던 전의는 어디 가고 이제는 조금 쉬고 싶었다. 내가 뒷심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번 기회에 뒷심이 부족한 걸 조금 고쳐야 하나. 돌고 돌아 자책이었다.

 

내가 그래서, 내 성격이 이래서.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쉬고 싶다. 지금은 멈춤이 아닌 중지이니까, 배터리가 모조리 닳기 전 충전 시간을 가지는 거니까.

 

 

[크기변환]coffee-3025022_1920.jpg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느슨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 부족한 뒷심이 내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을 했지만, 무작정 뿌리치기보다는 잠시 잡혀주고 싶다. 부족한 뒷심을 끊어낼 만한 힘을 충전하고 싶다.

 

아마 휴학을 할 것 같다. 한달 내내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이다. 아직 누구에게도 확실하게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다.

 

카메라 하나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영상에 미쳐 살고 싶다.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길게 늘어지는 고민을 끊어내고 짧게 생각하고 싶다.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곳에 빠져들고 싶다.


그러다 보면 하기 싫었던 경영도 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물론 바람이다. 나를 흔들어 놓을, 고요한 바람.



[안현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