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모두는 야코프다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3.05 13:4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방금 타자를 두드리기 전 삶은 왜 이리도 무겁냐고 두 번 정도 뇌까렸다. 자신의 무게뿐만 아니라 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오는 중량까지도 감당해야 하기에 더 괴로운 듯하다. 생각을 비우고 일상을 가볍게 즐기다가도 삶을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들을 마주하면 마음에 돌이 생긴다. 편치 않은 까끌거림이 속에서 맴돈다. 몸이 차게 식는다.

 

존재에 대해, 타존재에 대해, 집단과 그리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아주 지겨운, 그렇지만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관성과도 같다.

 

오늘도 나는 관성적으로 그 거대하고도 무거운 주제와 사회 기저의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버나드 맬러머드(Bernard Malamud)의 소설 『수선공(The Fixer)』이 불러온 바람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겪는 주인공 야코프(Yakov)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했다. 뉴스 칸을 뒤덮은 대만과 최근 미얀마 사건들을 떠올린다. 눈을 감고 80년대의 한국을, 그리고 이전의 수없이 반복된 역사를 그려본다. 야코프와 같은 역사적, 정치적 희생양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마주해왔고 현재에도 매 순간 마주할 수 있음이 새삼스럽게 공포로 다가온다.

 

야코프는 소설 속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다. 또한 사회 속에 존재하는 제삼자도 아니다. 모든 개개인이 야코프다. 우리는 우리가 야코프와 같은 위치에 설 수도 있다는, 어쩌면 이미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며, 우리를 야코프로 만드는 불의한 사회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핍박받는 한 유대인 남성의 이야기가 이리도 강하게 마음을 관통하는 것은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보편성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31.jpg

  

 

 

가진 것은 오로지 목숨



1911년, 스피노자의 철학을 사랑하는 평범한 유대인 수선공 야코프는 키예프(당시 러시아령)에서 살인죄로 누명을 쓰고 체포된다. 지독한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식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의 그는 좁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와 유대인임을 부정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죄로 체포된 우스운 비극에 대해서 말이다.

 

곧 풀려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던 초반과는 달리, 그를 인간다울 수 없게 만드는 것들—감금, 감시, 질병, 불결함과 주변인들의 죽음은 야코프를 벼랑 끝으로 내몰며 그 어떤 미래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를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감옥 속에서 신체적 자유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야코프에게 남은 것은 오직 목숨밖에 없다.

 

 

 

고통을 통해 획득한 정체성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범죄자로 몰아가는 사회구조와 권력을 마주하며, 그는 자신이 우연한 희생양이라는 사실과 자신만이 아닌 유대민족 전체로 이어지는 비극적이고 불가피한 고통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자신을 약자로, 역사 속에서 권력의 희생자로 존재하게끔 만든다는 사실—즉,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에 흡수되어 그 일부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안과 밖의 구별 없이 러시아의 모든 곳이 감옥이며, 결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야코프는 계속해서 부정해오던 유대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이는 야코프가 정치적으로 순수하던 과거와 달리 ‘정치적’인 인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정치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현실과 자신을 이용하려는 권력 구조, 그리고 그 권력 구조가 생산되는 러시아 사회 모두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코프는 닥쳐오는 비현실적으로 부조리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자신을 묶어둔 정신적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는 비참한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감옥에 찾아온 레이슬(Raisl)을 위해 사생아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해주는 등 자신의 고통에만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도 너그럽게 끌어안는다.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회의 불의함을 알면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유대민족을 위해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연상시킨다. 그토록 부정했던 예수를 닮아가며 야코프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거대한 고통은 인간을 벌거벗긴 채로 추락시킨다. 더 내려갈 곳도 없는 암흑 속에서 우리는 개안한다. 그 개안에서는 진흙 속에서 활짝 핀 연꽃의, 모래를 진주로 품어낸 조개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아픔은 성장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섧게 웃어본다.

 

 

141.jpg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도중, 야코프는 상상 속에서 불의한 권력의 상징인 차르(Tsar)의 심장을 총으로 쏘며 그 불의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상상일지라도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플롯 속에서 완전히 새롭게 정련된 야코프의 변화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소위 ‘innocent man’이었던 무지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불의한 사회에 대항하며, 마침내 그는 스피노자가 말했던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쟁취한다.

 

신체적 억압이나 속박 따위가 구속할 수 없는 혁명적인 불멸의 자유 말이다.

 

 

 

우리 모두는 야코프다


 

역사는 현실이며,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작되고 은폐되며, 또 선택된 기록이다. 어쩌면 역사는 잘 고증된 문학일지도 모른다. 풍부한 위증의 가능성은 역사라는 장르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희생양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왔다. 책에서는 유대인들이 제시되었지만, 희생양들은 결코 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 후보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득권층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정의된다. 강자임과 동시에 약자일 수 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타인이 나의 숨통을 쥐고 흔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야코프다. 언젠가 야코프였을 수도 있고, 혹은 내일 당장 야코프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 모두는 국가와 인종, 종교 및 지위와 관계없이 권력과 정치하에서 이용되거나 박해받을 수 있는 일종의 유대성을 띠고 있는 셈이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는 늘 약자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에게 잘못을 전가하면서 부조리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 부조리함을 타당하고, 또 합법적으로 보이도록 위장하는 데에 법이 사용되어왔다. 그 무엇보다도 정의롭게 바로 서 있어야 할 법이 권력과 엮여 불의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세상은 작가의 외침처럼, 정말로 병들어 있다.

 

이러한 구조들이 과연 괴멸될 수 있겠냐고 순진한 물음을 던져본다. 침음 속에서 정답을 읽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고한 희생양들은 계속해서 생산될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지지도 않은 채, 이 순간에도 또 하나의 야코프가 희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불편한 진실이 징계처럼 찾아와 나를 짓누른다.

 

 

 

함께 저항하는 집단을 향해


 

야코프와 같은 우리는 야코프를 닮아가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처럼 ‘역사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기득권층에 의해 소모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우선적으로 촉구하고 싶다.

 

기존에 알고 있던 자신이 깨어지거나 스스로가 약자임을 인정하는 일들—어쩌면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 그러나 약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의식을 깨운 채 호흡하는 자세는 꺾이지 않고 불의에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혁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자유를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속해서 상기하자. 이는 역사와 권력 구조 속에서 자칫 수동적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는 야코프들을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야코프들에 대한 공감을 통해 연대에 이르는 과정은 한 개인을 한결 성숙한 존재로 성장시킬 것이 분명하다. 독존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자기부정을 이룸으로써 타인의 손을 잡고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존재로 재탄생하기를 기도한다.

 

 

1411.jpg

 

 

야코프의 재판 결과를 독자가 알 수 없듯이, 개개인들의 투쟁으로 불합리한 사회가 변화될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길에서 야코프의 이름을 부르고 손짓하며 흐느끼던 이들을 우리들도 만날 수 있으며, 결코 홀로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수많은 야코프들이 기꺼이 서로 공명한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 해도 기대함으로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수선이 멸종된 세계를 껴안는 수선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미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