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작가의 마감 - 마감의 작가

글 입력 2021.03.0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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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가입니다. 저는 그냥 글 쓰는 사람입니다. 결국 같은 말임에도 두 문장이 전달하는 의미는 꽤 다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자신을 작가 대신 글을 쓰는 사람이라 부른다. 아직은 그런 거창스러운 말을 붙일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다 느껴서다. 괜히 겉멋만 들어 허세를 부리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은 탓도 있다. 그렇다 해서 작가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들을 매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름의 자격을 충족했을 터이다.


언젠가는 작가에 대해 막연한 동경심도 품었다. 시대가 시대니 붓이나 펜 따위를 잡고 원고지 펼칠 일은 잘 없으니, 시대에 맞춰 타자 몇 번 두들기면 굉장한 문장이 나올 것 같은 사람이 내가 보는 작가다.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할 일도 없거니와 혹시나 그런 일이 생겨도 그 원인은 말하기 힘든 것이리라 믿었다. 근거 없는 믿음을 매도하는 내가 이러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제는 그렇지 않음을 알았으니 앞으로 그럴 일은 없으리라 믿어본다.

 

 


Due Tomorrow, Do Tomorrow



오늘의 내가 싼 똥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 이 얼마나 음운의 조화와 음율과, 의미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누구나 감탄할 희대의 헛소리인가. 비슷한 말로 내가 일으킬 수 있는 작은 기적, 밍기적이라는 명언도 있다. 그 헛소리를 매일같이 알차게 행동으로 옮기는 우리는 헛소리만도 못 하나, 책을 넘기다 보면 구태 연연하게 어떻게든 변명을 붙여가는 작가들이 많음에 조금은 안심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쓸 수 없는 날과 쓰지 않는 날은 쓰려고 하지 않는 날과 엄연히 다르다. 쓰려고 하지 않음은 내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며, 조건이 허락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내가 하기 싫거나 귀찮은 날이다.


쓸 수 없는 날은 정확히 반대인 날로, 쓰고자 하는 의욕은 넘치나 여건이 내가 글을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나갈 일이 생긴다. 잘 되던 컴퓨터가 먹통이다. 오늘따라 몸 여기저기가 쑤신다. 약속을 빠지려니 오늘 나오지 않으면 큰일을 치루게 될 것이라는 지인들의 협박이 날아온다. 그런 날에는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이 사이에 놓인 것이 쓰지 않는 날이다. 여건도 의욕도 적절하게 마련했으나 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조금 더 힘을 비축하는 날이다. 오늘도 글을 쓰고자 한다면 쓸 수 있다. 중간중간 누군가가 나를 찾을 것 같다. 컴퓨터가 켜지기는 하나 이따금 버벅거린다. 그런 날에는 좋은 흐름을 이어가다 갑자기 끊길 것이 분명하다. 그럴 바에야 조금 비축하여 유유자적 흘러갈 수 있을 날에 글을 쓰는 것이 좋은 일이다.

 

 

예전부터 시 강좌를 위해 시론을 써달라는 의뢰가 있었음에도 한 줄도 쓸 수 없는 심정이기에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편집자 한 명이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조금 질려 더욱 고사했지만, 결국 쓸 수 없는 이유라도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펜을 든다.


막상 쓸 수 없는 이유를 쓰려고 하니 이게 또 좀처럼 써지지 않는다. 왜 쓸 수 없는지를 명확히 안다면 당연히 그 이유를 쓸 텐데, 사실 이유를 모르니 그저 ‘쓰지 못하겠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본문 중 발췌

 


이 중 고르라면 쓸 수 없는 날이 가장 싫다. 이 작가의 말처럼 쓰려고 하지마는 왜 쓸 수 없는지 몰라 속이 터진다. 이유라도 알면 해결하겠으나 이유도 모른다. 하기야 이유를 알고 있다면 그건 쓸 수 없는 날이 아니다. 이런 날에는 차라리 쓰려고 하지 않는 날이었으면 한다. 내 탓이라도 해버리는 것이 이유를 몰라서 찾아오는 답답함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


이름만 말해도 “아, 그 사람이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작가들이나 나 같은 사람이나 글을 쓰지 못할 때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에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다. 거기에서 오는 변태스러운 기쁨은 덤이다. 내가 동경하던 사람과 공통점이 생긴다는 것은 꽤 소소한 기쁨을 안겨준다. 나로서는 인생에 한 번 겪을 일이 있을까 싶은 사연도 있지마는 보통은 한 번씩은 겪었던 일이다.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사실이 아마 이 ‘구태의연한 변명의 기록’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이다.

 

 

 

마감의 작가



SNS라는 것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사람들이 무얼 하며 지내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했을 것이나, 지금은 SNS를 위해서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이상한 사회를 살고 있다. 마감하는 것은 글을 쓰는 작가지만 정작 그 작가가 마감에 쫓기는 일이 더 많다. 주객전도가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저 귀찮아서라면 내 몸을 움직이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이 마감이라는 녀석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막막함에 내 속만 타들어 간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말은 좋은 변명이 된다. 쓸 수 있는 날, 쓸 수 없는 날 쓰지 않는 날 중 어떤 날이 더 많건 간에 결국 글은 완성된다. 아직 마감일을 넘겨 글을 완성한 적은 없다는 것이 신뢰도가 떨어지기는 하더라도 내가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증거다. 그 모든 작가가 어찌 됐든 원고를 완성했으니 우리가 읽는 글들이 세상에 나와 있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말도 구태의연하게 늘어놓아 본다.


고진감래. 고생 끝에 느끼는 단맛이 더욱더 달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시작할지, 어떻게 풀어나갈지, 끝에 이르러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머리를 쥐어짜며 끊임없이 고민하다 마감을 끝낸 글이 더욱더 보람차다 말하지만 처음부터 술술 풀려서 날로 먹는 게 최고다. 별 탈 없이 흘러가는 삶이 가장 좋은 법이다.


이 책을 읽게 될 누군가가 우리처럼 글을 쓰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사람도 분명 무엇인가를 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모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어 잠시 쉬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떻게든 끝을 내려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냐며 자책할 수도 있다. 그런 모두에게 이 책은 아마 꽤 괜찮은 위로가 될 것이다.

 

유명한 사람도,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도, 우리처럼 그저 무난히 사는 사람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이 짧은 말이 유발하는 사고회로의 작용은 지쳐버린 마음에 퍽 따스한 위로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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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가의 마감

 

저자: 나쓰메 소세키 외

 

옮긴이: 안은미

 

쪽 수: 298쪽

 

가격:  15,000원

 

출판사: 정은문고

 

ISBN:9791185153391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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