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보스턴 미술관 Women Take the Floor 전, 리 크래스너의 <선스팟>
글 입력 2021.02.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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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의 제목은 이민진 작가의 저서 "파친코"의

첫 문장에서 인용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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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테이크 더 플로어

Women Take The Floor

 

전시기간 | 2019년 9월 13일 - 2021년 11월 28일

미술관 | 보스턴 미술관(Musuem of Fine Arts Boston)


  

저는 학생시절 저의 스승이자 화가인 한스 호프만이 제 캔버스를 보고 ‘너무 잘 그려서 여자가 그린 것인지 모를 정도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건 그의 방식으로 하는 칭찬이었죠. 저는 그 말을 여러번 곱씹어야만 했습니다.

 

 

보스턴 미술관의 기획전 Women Take the Floor에 전시된 리 크래스너의 1963년작 <선스팟> 옆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이었다. 이 기획전이 진행 중이던 3층까지 여성 작가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전시관들을 지나왔던 나는, 여성이자 예술가로서 나는 이곳에 환영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 몇줄은 여성 작가들이 지금까지 직면해온, 그리고 지금도 직면해있는 차별을 요약하기에 충분했고, 그래서인지 그림을 보니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림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의 아름다움이 나를 절망하도록 만들었다. 크래스너의 그림은 세계에서 14번째로 큰, 그 유명한 보스턴 미술관의 전면에 걸려있었다. 긴 투쟁 끝에 여성도 투표권을 얻게 된 미국 수정 헌법 제 19조 발효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성 작가를 재조명하는 기획전시의 일부였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그림의 자리로 꼭 걸맞다고 느꼈다. 하지만 역사는 그러하지 않았다. 대중이 그녀를 폴록 부인이 아닌 리 크래스너로 부르기까지는 그녀가 죽고서도 몇 년이 필요했다. 역사가 크래스너를 망쳐놓은 것이 분명했다.

 

 

 

추상표현주의의 남성성


  

1945년 이후의 예술계는 남성 헤게모니, 특히 백인 남성 헤게모니에 의해 유지되었다. 남성예술가, 비평가, 박물관, 갤러리감독, 딜러, 수집가들로 구성된 예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가 부상하던 시기는 잭슨 폴록과 더불어 두 명의 저명한 남성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해럴드 로젠버그의 시너지가 예술계를 장악했다.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에 이어 남성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선보였고 이는 언론 곳곳에 노출되어 대중들에게 거대한 캔버스, 자신감에 가득 찬 획, 액션페인팅과같은 새로운 남성적인 스타일을 소개했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붓의 사용, 크고 무거운 캔버스는 쉽게 남성의 성역할과 연결되었고, 남성성은 추상표현주의의 결정적인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행 뒤에는 조안 미첼, 일레인 드 쿠닝, 리 크래스너 등 결혼한 여성예술가들도 있었다.

 

 

 

아내, 뮤즈, 혹은 예술가



한스 나뮤트가 폴록과 크래스너의 스튜디오에서 포착한 폴록 크래스너 커플의 상징적인 사진은 1950년대 예술계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성적인 포즈로 열정적으로 캔버스에 페인트를 튀기고 있는 폴록의 뒤편에 크래스너는 초점이 흐리게 맞춰진 배경 한구석에 의자에 웅크린 채 앉아있다. 크래스너는 이 사진에서 ‘배경’의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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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나뮤트, 잭슨 폴록과 리 크래스너, 1950, 흑백 필름

 

 

사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래스너는 예술가가 아닌 아내, 또는 뮤즈로 조명되곤 했다. 크래스너는 소극적이고, 남편에게 지지적이며, 가정적인 인물로 대중들에게 소비되거나 대상화되어 그녀의 예술가 남편의 영감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평론가 개빈 버트는 폴록과 크래스너가 함께 찍은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서 바로 이 이미지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이성애적 역학’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의 예술적 전문성보다는 정상가족 내에서 어떤 규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페미니즘 예술과 타자성 포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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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엄 샤피로, 인형의 집, 1972, 혼합 매체

 

 

예술계 속 여성들은 예술적 창조를 통해 지속하여 남성 지배의 문화에 도전해왔다. 마리엄 샤피로의 1972년 작 <인형의집>은 미술관 내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남성들의 작품과 자수나 뜨개질 등 여성의 일상적 예술적 관행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여성은 예술에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여성이 수행해온 예술만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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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슬레이, 비스듬히 누운 폴 로사노, 1977, 캔버스에 유화

 

 

실비아 슬레이의 1977년작 <비스듬히 누운 폴 로사노>는 여성은 모델, 남성은 예술가였던 전통적 성역할을 전복시켜 남성 모델의 누드를 그려낸다. 이를 통해 슬레이는 남성 모델을 대상화하면서 동시에 남성 신체의 성적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당시 금기시되던 여성의 성적 유희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모두 페미니즘 예술의 훌륭하고 강력한 예이지만 여성 작가가 오롯이 그들로서 존재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을창조하는 것에는 실패한다. 오히려 그들은 여성을 비주류로 만들었던 성역할을 주류의 것으로 재정의하거나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에 도전함으로써 여성을 주류로 끌어올리려는 방법으로 페미니즘에 접근한다.

 

리 크래스너의 <선스팟>은 위 작품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방식으로 페미니즘 예술의 주요 돌파구로 작용한다. 그녀는 이 그림을 통해 예술계에서의 다른 대안들을 포착하고 있다. 크래스너는 추상표현주의의 남성적 규범을 흉내 내거나 그것에 반항하려 하지 않는다. 되려 그녀 자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함으로써 그것을 헤쳐나간다. <선스팟>은 역동적인 열기를 발산하거나 강렬한 감정을 토해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리 크래스너의 <선스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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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크래스너, 선스팟, 1963, 캔버스에 유화

 

 

연한 레몬에서 노랑, 오렌지에 이르기까지 약 5가지 색조의 노란색이 따뜻하고 편안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배경의 페인트는 초점이 흐릿한 사진처럼 조심스럽게 얼룩져 있다. 그 중 일부는 캔버스 가장자리에서 시작하여 중앙으로 향하는 부드러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다. 캔버스 중앙에는 비교적 굵은 붓놀림들이 눈에 띄지만, 여전히 조그맣고 짧은 획으로 마무리됨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색조가 빠른 획과 느린 획으로 모두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여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캔버스의 일부에서는 물감 튜브에서 짜낸 것을 바로 바른 듯한 두툼하고 둥근 페인트 덩어리들이 질감과 생동감을 더한다.


평면적이고 얼룩진 배경 위로 두꺼운 페인트가 뒤덮여 두 개의 독특한 층을 보여준다. 하지만 입체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마치 윗층이 은은하게 거품을 일며 아래층 위에서 진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을 봤을 때 마치 가운데의 춤추는 빛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로 들여다본 풍경처럼, 배경이 흐릿하게 뒤로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은은한 후광이 감돌며 캔버스에서 차츰 따뜻한 빛이 뻗어나가는 듯한 느낌마저도 연출되었다. 몇 분 더 들여다보자 그 빛은 점점 강렬해졌고, 마치 따뜻한 빛이 코끝에 닿는 듯했다.

 

 

 

섬세함이라는 타자성


 

여성의 예술에는 무시할 수 없도록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공유된 섬세함’이 있다. 여성스러움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이 섬세함은 남성 지배적인 예술계에서 때로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많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은 이것을 약점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전통적인 여성성을 탈피하고 전통적 남성성을 예술작품에 도입하던 여성작가들의 관행은 분명 의미있는 페미니스트 예술운동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여성성을 뒤로하고 전통적인 남성성을 모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공한 페미니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남성성을 주류이자 정상인 것으로 인정하는 제한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크래스너는 이 섬세한 감성이 그녀의 약점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실 크래스너는 이러한 공유된 섬세함과 감성을 미묘한 방식으로 탁월하게 사용하는 예술가이다. 크래스너는 섬세하면서도 강인하고 독립적인 스타일을 개발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타자성으로 용감히 뛰어들었다.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은 수 세기 동안 여성들을 고립시켰고, 지금도 여전히 여성 예술가들은 그들의 지성, 창조성, 기술, 그리고 전문성을 끊임없이 의심받고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술관에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별, 인종, 국적, 성적지향, 계급과 관계없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예술가들이 예술현장에서, 그리고 실생활에서 주목을 받고 적극적으로 양성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동시대의 난제는 결국 ‘어떻게 타자성을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신의 욕망이 주류에 편승하는 것이라면 상대방을 주류로 만드는 특성을 흡수하고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특성을 배반해야만 한다. 주류에서 완전히 탈피한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 주류에서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함께 살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이를 진동하면서 계속하여 타자성을 발견하고 보존하는 방법들을 찾아 나가야 한다.


미술사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를 생산해내는 과정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만이 들어올 수 있는 성역과도 같았고, 여성은 그 공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역사는 우리 여성들에게 실패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예술은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특히 여성이 가지고 있는 타자성을 탐구함으로써 검토되고, 인정되고, 기념되어야한다. 크래스너의 <선스팟>처럼 타자성의 실현은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지를 얼핏이나마 보여준다. 역사는 이미 위계를 바탕으로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우리 모두가 가진 타자성을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성장시키고 존중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마침내 “역사는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곽수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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