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사랑, 그 완주를 위하여! ‘런 온’ [드라마/TV]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와 언어에 대하여
글 입력 2021.02.22 12:47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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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전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인물관계도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인물관계도를 보며 오랜만에 끝까지 보는 드라마가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등장인물들은 한국말을 쓰면서도 각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기에,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주요 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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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릴 때는 뒤에 놓고 온 것들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오로지 앞에 있는 것들만 소중해서.”

숙명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남자,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 기선겸.

국회의원과 탑배우의 아들로, 1등을 놓치지 않는 프로 골퍼인 누나의 남동생으로, 가족이란 타이틀을 떼어놓고는 그는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그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오미주의 손을 잡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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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극복이라는 게 꼭 매 순간 일어나야 되는 건 아니에요. 주말엔 쉬어도 돼.”

관성적으로 뒤를 돌아봐야 하는 여자, 영화 번역가. 오미주.

미주가 보호 종료 아동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미안하다는 반응이었다. 섣부른 동정심에 대한 사과 따위는 원하지 않으며 그녀는 자기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 몸집을 부풀리며 살아왔다.
 
주인공 남녀 설정이 정반대인 것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앞만 보고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와 관성적으로 뒤를 돌아봐야 하는 여자. 매번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해온 남자와 극복이라는 게 매 순간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여자. 아침에 일어나서 뛰기 시작하는 남자와 저녁부터 번역 일을 하고 아침에 잠이 드는 여자. 서서 일하는 남자와 앉아서 일하는 여자. 잘난 가족들에 치여 누군가의 무엇으로만 살았던 남자와 가족이 없어 지킬 것이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여자. 소위 ‘알콜 쓰레기’인 남자와 말술에 술을 좋아하는 여자. 밥은 규칙적인 시간에 꼼꼼히 잘 챙겨먹는 남자와 일을 할 때면 귀찮다며 믹서기에 넣고 다 갈아 마시는 여자... 등등 이 밖에도 매 순간 정반대의 형태를 띄는 그들이지만, 결국 각자의 언어로 소통하며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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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하는 건 안 했을 때밖에 없어.”

스포츠 에이전시 대표 & <서명 그룹> 상무 서단아.

서명 그룹의 유일한 적통이지만 여자이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후처의 아들 때문에 후계 서열에서 밀렸다. 빼앗기면서 살았기에 언제나 ‘내 것’이 많아야 직성이 풀리며 늘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독한 워커홀릭인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시간이 묻어나는 그림과 함께 한 학생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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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없는 시간 내서 달려오는 거, 마음이 마음대로 안 돼서 그런 거예요. 마음의 쓰임새는 다 그런 거거든.”

미술대학생 이영화. 서단아 대표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높은 탑 위에 있는 라푼젤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더 가까이서 그녀를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운 여자와 애초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은 흘러가게 두고 눈앞의 사람을 잡으라는 남자. 마음 따위는 형태도 없고 쓸데도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 쓰임새를 믿는 남자. 이들 또한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만 사랑에 빠진다.
 
 
 
클리셰에서 탈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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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등장인물 설정이 서로 정반대인 것 말고도, 드라마의 재미를 더하는 포인트가 또 하나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활용되던 클리셰가 부자연스럽지 않게 비틀어져 전개된다는 점이다. 여자주인공 오미주는 가족도 없고, 대단한 재력을 갖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과 결혼하여 그동안의 삶을 청산해내는 신데렐라 캐릭터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들장미 소녀 캔디로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이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지켜내고,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다.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했기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보통의 드라마는 상대방과 재력과 조건이 차이가 나면 극 중에서 초라하게 표현이 되기 마련인데, 미주의 당당한 태도 덕분에 오히려 근사해 보인다. 말술에 한때 흡연자였던 여주인공, 할 말 안 참고 다 하는 여주인공, 남자 주인공과 입을 맞춘 후, 부끄러워하지 않고 립밤은 어떤 거 쓰냐고 묻는 능청스러운 여주인공.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는 남자 주인공 선겸의 아버지 앞에서, 선겸의 손을 잡아채 끌고 가는 여주인공이 바로 오미주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능동적인 여자와 어릴 적부터 운동만 했기에 달리기 빼고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수동적인 남자. 그랬기에 남자가 새로운 도약을 하도록 이끌어 나가는 여자.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으며 부드럽게 비틀어 여자가 리드하는 그림이 신선했다.
 
또한 육상부 선배들로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후배를 위해 마찬가지로 그들을 폭행하는 기선겸. 후배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그의 에이전시, 그의 아버지 모두 언론을 통해 그를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그는 끝까지 그의 가해 행위를 포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입으로 직접 ‘위력관계에 의한 폭력’이라고 표현할 뿐. 피해 선수는 결국 암묵적으로 퇴출당했고 내부고발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지만 기선겸이 일으킨 파장은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 파장은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폭력을 노출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 중 기선겸의 어머니는 배우이다. 자녀들이 모두 운동선수이지만, 뒷바라지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 배우로서의 커리어에 집중한다. 그녀를 영부인 시켜주겠다며 자기의 정치 인생의 도구로 삼는 남편 기정도 의원에게 그녀는 말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왜 네 인생의 소품으로 쓰려 해?”
 
또한 재벌 3세 CEO인 수영의 캐릭터. 이제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응원하는 시선이 많아져 잠잠해지는 추세긴 하지만 한국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오래된 클리셰로, 남자 주인공이 재벌 3세인 경우가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이 여자이다. 상대역은 가난하고 평범한 대학생 역할인 남자 주인공이다.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 속의 여자와 남자의 역할이 뒤바뀐 역 클리셰가 눈에 띈다. 남자 주인공의 학교 앞에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차를 세워두고 그를 기다리는 장면 등 구태의연한 설정에 얽매여 있지 않고 교묘히 뒤바꾼 모습이 재치있고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의 입맞춤 또한 두 커플 다 여자가 먼저 한다.
 
“너는 왜 결혼 안 해?”라며 무례한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친구에게 너는 왜 결혼하냐는 질문으로 대응하며, 당황한 친구의 모습에 “그걸 왜 역질문을 받고 깨달아?”라고 반문하는 미주의 모습. 교회에서 만난 집사님이 ‘얼평(얼굴 평가)안해서, 엄마 닮아서 예쁘네. 그딴 말 안 해서 좋다.’고 표현하는 대사 등이 사이다 발언으로 시청자들에게 호평받았다.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매너와 행동을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지키지 못한 부분이 지금까지도 사회와 오래된 극본들에 편재되어 있었기에 뜨거운 반응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소수와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

 

한 기업의 상무로 재력과 권력을 지닌 서단아. 그렇지만 여성이기에 후계 서열에서 밀려났고, 정략결혼을 강요받고 있다. 강제적인 결혼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은 단아는 레즈비언이라며 가족들을 속인다. 시집이나 가라며 자신을 도발해오는 이복오빠 서명민에게 “너나 나나 여자 좋아하고 최고경영자 되고 싶지. 근데 내가 하면 비정상이고 네가 하면 정상이래. 너랑 나랑 타고난 거 딱 하나 다른 게 성별인데”라는 일침을 선사한다. 또한 서단아에게 “너 축구하는 것도 아웃팅해서 관두게 한 거 기억 안 나냐. 이번에는 본사 발도 못 붙이게 해줘?”라는 그에게 “아웃팅이란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고 나발이고 냅다 밝히는 행위를 말한다. 야, 축구를 아웃팅? 글로벌하게 사업하고 싶으면 공부를 좀 하라고. 젠더 감수성.”이라며 가르침을 준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발언이었다.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재벌 3세로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게 많았지만, 그에게도 약자로서의 아픔이 존재한다. 그녀는 사회의 유리천장에 부딪히는 여성이며, (거짓말이긴 하지만) 성 소수자로서 약자인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당당하게 낸다. 나는 그것이 극 중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이기에, 더 널리 퍼질 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슬픔을 느끼는 와중에도 어떠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오미주는 극 중 ‘보호 종료 아동’이란 단어로 표현된다. 고아가 아니라. 소수자를 표현하는 언어를 제대로 명명해내고 전반적인 부분에서 혐오표현을 지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 드라마에서 나는 미주가 불 꺼진 영화관에서 느낀 ‘안전함’을 느낀 것 같다. 이 밖에도 인종 차별을 하는 감독에게 참지 않고 반발하는 미주에게서 레이시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직관할 수 있었고, 폭행을 당한 당사자이지만 결국 내부고발자로 분류되었던 김우식 선수가 다시 일어나고 그 앞날이 기대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에서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스민 낙관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 신형철의 없음은 없어질 수 없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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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미주의 마라톤 엔딩 장면에서, 청소년기의 미주와 선겸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보호 종료 아동으로서, 제도권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으려 매 순간 발버둥 쳤을 그녀의 삶. 불 꺼진 영화관에서 모두가 깜깜하다는 사실에 위로가 받고 눈물 흘리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달린다. 마침내 완주를 해내며, 결승선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정치 인생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의 삶을 살아가다 처음으로 병실에서 도망쳐 나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달리기를 만난, 과거의 선겸과 마주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결핍과 아픔을 마주 보며 영화 ET에서처럼 검지손가락을 마주 댄다. 영화에서처럼 손가락을 마주 댐으로써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 부분에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책 속의 신형철 평론가님의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았다. 결핍은 이미 없는 상태이므로, 더는 없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요하고 단호하게, 함께일 것이며 서로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랑과 해피엔딩의 재정의, 그리고 런온의 마지막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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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로맨스 장르에서는 뜨겁고, 없으면 죽고 못 살고, 각자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가 되고, 그렇게 스며들어 한줄기로 가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이 드라마는 조금 다르다. 이 드라마에서는 각자의 세계가 공존하도록, 두 선이 하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놓이게, 그냥 둔다. 사랑한다고 해서 서로의 세계가 연합되어 꼭 한 줄기로 만들어져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사랑을 받을 수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드라마에서는 낭만적인 사랑을 강조하며, 사랑을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희생하곤 한다. “서로를 잘 지키며 사랑해야지.” 미주가 나랑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고,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해야 둘이 오래 만날 수 있다고, 선겸에게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희생적인 사랑이 지나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서늘해 보일 수도 있는 이 드라마의 위로가, 사랑은 꼭 열렬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가 좋았다. 오히려 덕분에 안온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음은 기획 의도의 일부이다.
 

 

어딘가 하나씩 모자라거나 한 군데쯤은 망가지고 결핍이 있는 이들이 서로를 위안하는 방식은, 뜨겁고 열렬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 차가운 위로를 전하겠지만, 이 드라마는 물을 것이다. 위로가 꼭 뜨겁고 따뜻하기만 해야 할까? 사랑은 꼭 열렬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이 마음을, 말을 전해야 할까.

 

 
아무래도 아주 확실하게 전해진 듯 하다.
 
해피엔딩 또한 새롭게 정의된다. “내가 진짜 온갖 컨텐츠를 다 보고사는 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그 해피엔딩이라는 게 결국에 문명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허상이야. 애초에 존재를 안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 여기서는 각자가 그리는 해피엔딩을 짧게 이야기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아 됐고 건배나 하자”라‘고 하며 맥주잔을 기울인다. 건배사는 바로 ‘완주를 위하여!’ 아무래도 현시대 우리들의 삶은 “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엔딩 보다는, 지치지 않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이게 해피엔딩이지.
 
그리고 런온의 마지막 메시지. 최종회에서, 미주가 자신이 번역한 영화에 대해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잘살았으면 좋겠어. 상냥한 사람들을 바보 취급 안 했으면 좋겠어.”
 
나는 이 문장이 이 드라마를 요약해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섬세한 언어로 소외되고 있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올바른 언어로 명명하여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스쳐 지나가는 타인에게도 딱 그 정도의 배려가 스민 적당한 거리감이 유지되었고 그 사람들이 바보로 취급받지 않았다.
 
비관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본인의 무례함을 상대의 예민함으로 치부하는 일이 번번히 발생하며, 무언가를 계산하지 않고 베풀면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호구 취급을 받기에 십상이다. 나는 대단히 선한 사람도, 희생적인 사람도 아니지만, 쓸데없는 잔정이 많은 사람이기에 바보나 호구가 종종 되곤 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도 내가 원해서 베푼 것이기에 후회는 없었다. 어떠한 기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을 위했던 마음이 호구로 비춰지는 것이 비참했다. 그리고 이 '쓸데없는 잔정'이라는 말이 우리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의미로 통용되지 않았다. 서로에게 늘 감사해했고, 배려심이 스민 친절이 곁에 함께 있어주었다. 아마도 내 주변에 따뜻한 온도의 사람들이 가득했고, 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그들에게 사랑받았기에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도록 상처로 남을 것 같은 무례한 발언을 들었을 때는 그가 무례한 것인지, 내가 예민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자기 비하도 해보았지만, 손을 써보려 할 때 즈음엔 모든 것이 지나간 뒤였고 되새김질은 나만 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애초에 그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분명히 내가 보지 못한 섬세한 그들의 면이 있을 것이다. 또한 반대로 나도 무정한 사람일 수 있었다. 인간은 부정적인 기억을 더 뚜렷하게 기억하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여겨도, 상처 받지 않음이 될 수는 없으며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가 더욱 위로가 되었다.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잘살았으면 좋겠는 마음, 그래서 잘살기 위해 더 섬세해지고 다정해지자고, 노력하는 마음. 내가 세상에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결국 잘살 수 있을 것이고 상냥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편재해 있을 것이라는 낙관을 다시 가져본다. 그리고 나도 끊임없이 그 친절과 온유함에 대해 쓰고, 전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계속 된다면 언젠가는 세상에 조심스럽고 따뜻한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증가할 것이라고,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바람을 해본다.
 
 
[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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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미미
    • 저는 런온을 보지 않았어요. 좋은 드라마라고는 익히 들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얼마나 섬세하게 좋은 드라마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 되면 꼭 봐야겠어요!! 섬세하고 다정한 건 무르고 약하다는 것과 같아서 이 미친 세상을 살아내기에 더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실이 상처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 드라마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얼마나 단단하고도 강한지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막 희망을 떠올리게 되네요 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 0
    • 댓글 닫기댓글 (1)
  •  
  • 박세나
    • 2021.03.09 0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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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미미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잘 알아주시다니..! 감사한 댓글이네요. 낙관과 희망을 느끼시는 분들 덕분에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 같아요. 댓글 작성자 분도 섬세한 사람들의 다정함 속에서 언제나 자리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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