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눈송이 이야기 - 그해 겨울에 있었던 일

글 입력 2021.02.1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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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하얗게 질린 어린 별들이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온다. 바람은 따스한 손길로 그들을 어루만진다. 더욱더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어부바를 태운다. 새벽의 달과 해는 그들이 스며들 세상을 비춘다. 너무 춥지도, 그렇다고 덥지도 않게. 눈송이들의 보드라운 몸이 상하지 않을 적당한 온도로 세상을 달구며 묵묵히 그네들의 여정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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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 A

A는 겁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늘 눈을 감고 있었다. 구름에서 뛰어내릴 때도, 바람을 타고 있을 때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람 소리는 잦아들고 세상이 고요해졌다. A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땅이 보였다. 하늘에서 태어난 그녀가 드디어 땅에 내려왔다. 그녀는 어느 아파트 화단의 벤치에 내려앉았다.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A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좀 더 환해져 있었다. 해는 중천에서 맹렬하게 빛을 쏟았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그녀를 향해 뛰어왔다. 그중 하나가 A를 자신의 손안에 담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A는 덜컥 겁부터 났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여전히 벤치 위에 있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던지지도, 입에 넣지도, 눈사람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녀에게 날개가, 부리와 꼬리가 생겼다. 한 마리의 오리가 거기 있었다. 그 오리는 바로 A 자신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A를 볼 때마다 모두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쓰다듬어 주기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소심한 A는 그 관심이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렇게 사랑받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A는 아이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행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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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 B

구름 위에 있을 때 하늘은 땅의 이야기를 B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그래서 B는 땅을 동경했다. 그곳에 발을 딛고 시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B는 오래도록 바람의 고삐를 쥐었다. 땅에 내려앉기 전, 조금이라도 땅 위의 풍경들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는 바람의 재촉을 듣고 고삐를 쥔 손을 놓았을 때, 그는 어느 동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아주 조그만 동네. 좁은 골목들 사이사이로 집들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그런 동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이 될까. 담벼락에 쌓인 눈이 될까. 아니면 지붕 아래의 고드름이 되려냐. 무엇이든 좋으니 이곳에 사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때였다. 한 아이가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왔다. 앙증맞은 발에서는 걸을 때마 뽁뽁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포동포동한 얼굴이 B의 가슴에 그대로 날아와 박혔다. B는 몸을 돌렸다. 아이는 내리는 눈을 보며 손을 뻗었다. 눈송이들은 아이의 손에 닿자마자 그 뜨거운 온기에 빠르게 녹았다.

 

이번엔 아이가 입을 벌렸다. 마치 지구가 달을 당기듯 B는 아이에게 조금씩 이끌렸다. 그러다 마침내 아이의 조그만 입속으로 B가 내려앉았다. 아이의 혀에 몸이 닿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훅 밀려들어왔다. B의 여린 몸은 그 열기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B의 몸이 녹기 시작했다. 한편 아이는 B가 자신의 혀에 닿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B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무엇이 될까 싶었는데 이렇게 누군가의 행복이 되어주는구나. 추억이 되고 기쁨이 되어주는구나. 비록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결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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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 C

C는 눈사람이 되었다. 흙바닥 위에 내려앉은 평범한 그를 누군가 굴리고 빚어 눈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C를 보며 자주 웃었다. 누군기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그를 품에 안아 온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목도리를 둘러주고 떠난 이도 있었다. C는 그런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가 퍽 좋았다. 한낱 눈송이에 불과한 스스로가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윽고 거리에는 밤이 찾아왔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C는 잠시 잠이라도 청할까 싶었다. 하늘에서 땅까지 오느라, 오늘 하루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느라 C는 지쳐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C는 다시 눈을 떴다. 어둑한 그림자 하나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C는 다시 입꼬리를 당기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림자는 C의 앞에서 발걸음을 세웠다. 그림자는 C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때였다. 무자비한 폭력이 C에게 날아들었다. 그림자는 C를 향해 거칠게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불시의 일격에 C는 감히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처음엔 팔이, 코가, 몸통이, 머리가 그의 손과 발에 으깨어졌다, 한바탕의 난리 브루스가 끝난 후, 그림자는 다시 한번 C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다음날 아침, 다시 돌아온 흙바닥 위에서 C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길가에 흩어진 그의 몸은 도시의 먼지와 뒤섞여 검게 물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C를 보며 웃지 않는다. C는 가만히 생각했다. 어제 만난 그가 자신을 걷어찼던 이유에 대해서.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C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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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 D

D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사람도, 오리도, 하다 못해 던져지는 눈뭉치도 되지 못했다. 그는 그냥 길 위에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작 길 위에 있을 뿐인 D를 많이 싫어했다. 이유는 하나. 미끄러우니까. 그의 몸 위에서 미끄러진 사내는 한바탕 욕을 내뱉으며 흙이 덕지덕지 묻은 신발로 D를 짓밟기까지 했다.

 

결국 사람들은 D의 몸에 소금을 뿌리고 빗자루로 쓸어 버렸다. 몸에 닿은 소금 때문에 D의 몸이 빠르게 녹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햇빛까지 내리쬐었다. 살아남기 위해 D는 함께 구석으로 내몰린 이들과 몸을 밀착했다. 서로의 냉기를 나누며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버텨볼 요량으로. 한편 가까운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내뿜은 먼지가 쉴 새 없이 휘날렸다. 그 먼지에 하얗던 눈송이들의 몸은 까맣게 물들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흉하다고, 추하다고 말했다.

 

다른 눈송이들에게 기댄 채, D는 하늘에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강바닥의 얼음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의 몸을 딱딱하게 얼려 물속의 모든 이들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제 이룰 수가 없다. 다른 꿈을 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D는 할 수만 있다면 하늘로 돌아가고 싶었다. 적어도 그땐 무엇이든 꿈꿀 수 있었는데. D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땅속으로 스며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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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 E

E는 냉장고 속에 갇힌 눈사람이었다. 밤보다 어두운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던 날을 생각했다. E를 만든 건 어느 소녀였다. 소녀는 조그만 손으로 조물조물 E를 빚어 눈사람으로 만들었다. 낙엽을 붙여 눈, 코, 입도 만들어 주었다. E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소녀는 추워서 빨개진 손을 호호 불며 E에게 미소를 지었더랬다. 그런 소녀를 E는 사랑했다.

 

소녀는 E를 데리고 집에 왔다. 소녀의 집에서 둘은 함께 놀았다. 소꿉놀이도 했고, 동화책도 읽었다. 하지만 E에게 소녀의 집은 너무 따뜻했다. E의 보드라운 몸은 그 열기를 견디지 못했다. E의 몸이 조금씩 녹았다. 깜짝 놀란 소녀가 E를 냉장고에 넣었다. 둘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때부터 E는 냉동실에서 살았다. 소녀와 E는 매일매일 함께 놀았다. 소녀와의 놀이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E는 소녀에게 있어 최고의 친구였다. 소녀 역시 E에게 단 하나뿐인 최고의 단짝이었다.

 

한편 어느 날부터인가 냉장고 문이 열리는 텀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가, 그다음엔 이틀이, 사흘이, 일주일이 냉장고 속에서 순식간에 흘러버렸다. 소녀와의 놀이 시간도 점차 짧아졌다. 소녀를 기다리며 E는 소녀가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혹시 나의 문제였을까. 하긴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E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보드랍던 E의 몸은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점차 딱딱해졌다. 새하얗던 몸은 손때와 함께 어느새 탁해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냉장고의 문이 다시 열렸다. 커다란 손이 들어와 E를 거기에서 꺼냈다. 손의 주인은 소녀의 엄마였다. 그녀는 소녀를 불렀다. 그러자 소녀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E가 반가운 듯 한껏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소녀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고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E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기가 이미 버려졌다는걸.

 

소녀의 엄마는 E를 싱크대 위로 던져버렸다. 이윽고 뜨거운 물이 E에게 쏟아졌다. 딱딱하게 얼어있던 E의 몸이 빠르게 녹았다. 그 열기를 인내하며 E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소녀와 함께 보내던 시간을 생각했다. 내가 너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너는 그게 아니었나 보구나. E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 그는 소녀가 정말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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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티키틱 '팔면 좋겠다'

 

 

눈송이 F

F는 바람을 타는 것에 서툴렀다. 물방울 시절, 구름 안에서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연습을 해봤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하늘과 다른 눈송이들은 그런 그를 자주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F는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에 올라타지 못했다. 한번 놓친 고삐는 거친 파도가 되어 그의 몸을 덮쳤다. F의 여린 몸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어지러움에 멀미가 올라왔다. 다른 눈송이들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게 보였다. F는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F는 자신이 누군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누군가의 발걸음에 맞춰 세상은 잔잔하게 넘실댔다. F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성이 거기 있었다. F는 그녀를 ‘어떤 여자’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곁에서 지켜본 그녀의 삶은 정말 고달팠다. 조그만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타자를 두드렸다. 잠시 커피를 마실 시간도,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그녀는 계속 일민 했다. 점심시간도 겨우 배만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 놓인 일들은 끊임없이 증식했다. 한편 사람들은 그녀에게 늘 소리를 질렀다. 뭐가 아니라는 둥,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둥.

 

그러다 마침내 일이 터졌다.

 

“미친 새끼야!”

 

뚱뚱한 사내가 고함을 치며 그녀에게 휴지를 집어던졌다. 휴지는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소란스럽던 사무실이 한순간에 싸해졌다. 잠시 후, 누군가 일어나 사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떤 여자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맞은 부위가 얼얼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가 던진 휴지를 주웠다. 그녀는 그걸 사내의 책상에 도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사무실을 빠져나와 비상구로 향했다. 찬 공기 덕분에 이마의 열기가 조금씩 가셨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로 핸드폰을 꺼냈다. SNS를 켰다. 거기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이 가득하다. 그 모습들을 보며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F는 그녀의 뚱한 얼굴이 퍽 슬펐다. 차라리 울기라도 하지. 짜증이라도 내지. 욕이라도 하지. 그저 뚱한 표정이 뭐람. F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F는 그녀를 대신해 오늘 하루라도 살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대신하기엔 F의 몸은 너무 작았다.

 

F는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었다. 이윽고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체온에 F의 몸이 빠르게 녹았다. 사그라드는 몸의 감각을 느끼며 F는 그녀를 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하루를 대신 살아주는 인형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대신하여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되어줄 작정이었다. 그렇게라도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

 

눈이 녹았다.

 

어느새 겨울은 다 갔다. 이제 봄이다. 그 해 겨울에 있었던 일들은 이제 하늘과 땅만 기억한다. 이 모든 건 그냥 우리 주변의, 우리도 몰랐던 작은 이야기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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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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