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를 마주하는 웃음 - 유에민쥔, 한 시대를 웃다!

과연 한 시대를 향해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유에민쥔의 예술세계였다.
글 입력 2021.02.1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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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tombment, Oil on Canvas 380x300cm 2010 ⓒYue Minjun 2020.jpg

The Entombment / Oil on Canvas / 380x300cm / 2010

ⓒYue Minjun 2020

(사진제공: 유에민쥔, 한 시대를 웃다! 사무국)

 

 

폭- 하고 잔뜩 감은 눈, 눈에 어찌나 힘을 준 건지 눈썹 뼈 아래 선명하게 파인 눈두덩이. 힘껏 치달아 볼 중앙까지 침투한 입꼬리. 암흑같이 시커먼 입속. 그 안에 이상하리만큼 균일한 크기로 나열된 무수한 이. 빛을 내며 반짝이는 매끈한 피부. 생기가 넘치다 못해 쨍한 분홍빛으로 열이 뻗쳐오른 듯한 얼굴. 무슨 일인지 얼굴을 잔뜩 부풀리고 쥐어짜며 웃는 이들이 거대한 화면 가득 채워져 있다.


얼굴이 말하는 완벽한 웃음이란 게 있으면 이런 것일까. 적어도 세상 가장 선명한 웃음인 건 확실한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너무 완벽하고 선명한 웃음이어서 어떤 의미의 웃음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절망인지 희망인지. 자포자기한 웃음인지 절망을 넘어서려는 웃음인지. 그들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상황 속에 있든 상관없이 계속 웃을 뿐이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하며 웃고 있는 사람들의 군상을 그린 이는 차이나 아방가르드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인 ‘냉소적 사실주의(시니컬 리얼리즘. 중국어로는 ‘완세(세상을 조롱하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 유에민쥔(岳敏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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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그림

(임영, 연안의 빛은 영원하리, 1971)

 

 

1949년, 중국이 공산당 지배체제로 들어가면서 정치적 흐름에 따라 중국 미술의 역할과 위치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술은 사실주의 미학만이 허용되었고(야수주의, 추상미술 등은 부르주아 미술이라 여겨 금지됐다) 그림의 주제는 노동자, 농민, 병사의 삶에 대한 것이 되었다. 특히 1966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중국 미술은 마오쩌둥 우상화 작업을 위한 시각적인 도구로 이용되었다.


마오쩌둥을 위인으로 그려낸 초상화, 인민들을 살갑게 보살피는 마오쩌둥의 모습, 어디에서 어떤 고된 노동을 하든 열정적인 모습으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모습이 보여주기 식으로 무수하게 그려졌다. 무엇보다 이 시기 선전화에는 “홍, 광, 량”이라는 원칙이 적용되었었다. 인물을 붉은빛의 얼굴로, 빛이 나게, 그리고 크게 그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결과로 문화대혁명 시기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은 붉은 색채로 빛나는 듯한 밝은 모습으로 그려졌고, ‘삼돌출’ 원칙에 따라 중요한 인물일수록 화면 전면에 더 크게 그려졌다.


억압 속에서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은 전혀 내비칠 수 없던 시대에 정치적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 속 사람들은 '강요된 기쁨’을 위해 웃고 있는 것이다. 이유가 있어 웃는 것이 아닌, 그저 웃고 싶어 웃는 것도 아닌, 겉으로만 드러나 있을 뿐인 그야말로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들의 군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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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이후에는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중국 사회에 급속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작용, 미처 치유되지 못한 폭력의 상처가 공존하는 중국의 냉담한 현실을 마주한 유에민쥔은 개인이 존재할 수 없던 문화대혁명 시기, 정해진 원칙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어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을 극대화에 극대화를 거쳐 또 다른 천편일률적인 군상을 거대한 캔버스 위에 탄생시켰다.


그렇게 유에민쥔은 오히려 지독하게 완벽한 웃음에 도달하려는 듯이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웃고 있는 인물들, 자신의 분신들을 통해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자조적인 시선으로 자신과 사회를 응시했다.

 

 

“내 작품 속 인물은 모두 바보 같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강요된 부자유와 허무가 숨어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면서도 아무 생각없이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내 자신의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동시에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 유에민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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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에서 뒹굴다 / 캔버스에 유채 / 280x400cm / 2009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이토록 변했지만 유에민쥔의 웃음은 여전히 시대를 묵직하게 응시하는 것 같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캔버스를 가득 채운 고꾸라진 자세로 웃고 있는 군상을 보자면 씁쓸한 유쾌함 못지않게 어떤 위압감도 느껴진다. 자아도 타아도 없이 어디서든 웃어버릴 수 있다는 기세로 그림 속에서 뒹굴고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자면 이들의 웃지 않는 얼굴은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작품을 볼수록 웃음으로 제 존재가 지워져버린 장면 앞에서 공허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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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 / 캔버스에 유채 / 230x200cm / 2011

 

 

그들은 웃음만을 말할 뿐이다. 정확히는 보여줄 뿐이다. 감정조차 가려진 웃음은 선명할수록 모호하다. 웃음에 공감할 이유도 비판할 이유도 알 수 없어 작품을 보고 있는 내 얼굴 근육도 괜히 어색하게 일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저런 모습으로 저기에서 웃고 있는 걸까? 만약 이 질문을 지금 시대에 던진다면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전혀 낯선 장면이 아닌 <방관자>는 지금 사회를 비추는 거울 또는 자화상처럼 읽혔다. 왜 저런 모습으로 저런 상황 속에서도 웃고 있는 걸까, 저들은(우리는) 왜 그것을 그저 보고만 있는 걸까, 우리는 그것에 웃는 이유를 스스로 잘 이해하고는 있는 걸까...

 

 

“유에민쥔의 작품은

특유의 표정과 풍자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 미술평론가 리시엔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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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1 / 캔버스에 유채 / 200x230 / 2012

 

 

사회 속 절망과 허망함을 괴로운 감정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시니컬한 웃음의 표현으로 비판하는 예술가 유에민쥔. 이번 전시회에서는 내가 그렇게만 기억하고 있던 유에민쥔 예술세계의 새로운 주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죽음의 찬미”를 그린 그림들은 절망 앞에서의 공허한 웃음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죽음의 상징 속에서도 제 표정을 잃지 않은 웃음들은 “죽음 뭐 별거 있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허망함이 아닌 호탕함으로, 삶에서 연인을 만나 사랑하듯 죽음 역시 당연한 일임을 웃음이라는 언어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중 <연인1>은 사랑도 죽음도 웃음도 세상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한 데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꽤나 경쾌한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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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감상할수록 다양한 맥락과 의미를 지닌 유에민쥔의 작품이 펼쳐졌다. 냉소적인 시선과는 또 다른 감정과 온도로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유에민쥔을 그저 블랙 유머, 사회비판적인 예술가로만 기억하던 나의 관점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에민쥔의 예술은 “이 시대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닐까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 작으로 이루어진 “일소개춘, 한 번 크게 웃으니 세상이 봄이다!” 주제 속 몇몇 그림들은 산뜻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유에민쥔의 웃음은 다양한 캐릭터와 명화 속에, 그 사이에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 조합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호탕한 웃음 한 번 터트릴 순간 없었던 시대 속에서 보자니 누구도 쉽게 막아설 수 없는 해맑은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The Blue Ocean, Oil on Canvas 250x200cm ⓒYue Minjun 2020.jpg

The Blue Ocean / Oil on Canvas / 250x200cm / 2018

ⓒYue Minjun 2020

(사진제공: 유에민쥔, 한 시대를 웃다! 사무국)

 


만약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향해 웃어야 한다면 유토피아에 이른 마냥 순진하게 웃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허망함만을 안고 살아갈 수도 없는 것 같다. 코로나19 이후 흔히 ‘절망적인 시대’라 정의된 오늘날 사회의 초상 속에서 뜨거운 미소를 던져보면 어떠하고, 여러 모순이 드러난 사회를 향해 뼈저리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들 어떠할까. 결국 모두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웃음’이야말로 이 모든 걸 동시에 함축할 수 있는 언어라 할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유에민쥔의 예술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존재를 거부하고 억압을 가하던 시대를 향한 조롱과 자조적인 시선으로 그려진 웃음부터, 죽음도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는 웃음, 어디서든 꽃처럼 힘차게 피워내려는 듯한 호탕한 웃음까지. 얼핏 보면 같은 표정 같지만, 저마다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웃음의 향연이었다. 정말 ‘웃음’은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품을 수 있는 언어일 것이라는 확신이 일어나는 예술세계였다.

 

보는 이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 유에민쥔의 그림 속 웃음에서 감정을 떠올리고 무엇인가를 읽어내는 이는 결국 감상자인 ‘나’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를 읽어내는 존재들은 자연스럽게 이들이 공존하는 시대가 어떤 모습인지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에민쥔의 웃음을, 예술세계를 한 시대에 존재하는 이들의 가치관과 시선을 투영하는 ‘그릇’이라고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전시 초반에는 감정도 연유도 파악할 수 없는 웃음들에 그 얼굴이 ‘가면’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전시회 마지막 즈음에 새로운 질문과 함께 작품을 다시 마주해 보았다. “이 웃음이 가면이 아니고 ‘그릇’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어떤 의미와 시선을 저곳에 담으며 작가와 함께 시대를 사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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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 현실주의 1 / FRP에 아크릴 / 78x30x95cm 30kg / 2003

 

 

“웃음이 여러분에게 행복한 순간을 가져다주길 바랍니다” 전시회 마지막에 적힌 작가의 말이 사뭇 생경하게 느껴졌다. 비판적인 예술가인 줄만 알았던 유에민쥔이 ‘행복의 순간’을 말하기도 한다는 것에, ‘행복’이란 단어 자체가 너무도 어색하다는 생각에, 과연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며 행복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생각하게 되는 질문에 그랬다. 어쩌면 우리의 웃음이 비로소 행복에 대한 것이 되길 바라는 예술가의 바람이 담긴 문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함께 일었다.


이 모든 건 이번 전시회를 통해 내가 유에민쥔의 예술을 새롭게 읽어낸 부분들이기도 했다. 웃음 하나로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시대를 생각하게 하는 전시는 나로선 거의 처음이었다. 그만큼 유에민쥔이 중요한 작가로 회자되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던 전시이기도 했다. “시대를 어떻게 마주하고 응시할 것인가” 유에민쥔의 예술은 예술가 자신에게도 시대 자체에도 그림을 마주하고 있는 동시대인인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대답은 우리 모두의 몫일 테다. 꽤 묵직한 여운을 느끼며 전시 공간을 벗어났다. 과연 한 시대를 향해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유에민쥔의 예술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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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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