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서 오세요, 책의 낙원에 - 라스트 북스토어

글 입력 2021.02.0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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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모습을 좋아한다. 어떤 책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심신을 안정시킨다. 그래서 집에서는 커다란 책장을 자주 쳐다봤고 학교에서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사춘기 학생의 질풍노도 같은 마음은 수많은 책에 둘러싸이기만 해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냥 종이책이 풍기는 편안한 느낌이 좋아서 책 곁에 자주 머물렀을 뿐인데 한두 권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느새 취미란에 당당하게 독서를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에게 책은 의무적으로 독후감을 제출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이 대한민국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을 만한 책으로 매년 같은 내용의 독후감을 쓰곤 했다. 그러면서도 학교 도서관에 머무는 시간은 좋아했다. 어쩌면 그 시절 나는 책을 싫어했던 게 아니라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적절한 계기 하나만 마련돼도 금방 책의 매력에 빠졌을 텐데, 독서는 따분한 숙제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갇혀 책의 매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독서에 눈을 뜬 중학생 때부터 나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책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어느 수업에서도 배우지 못한 삶의 진실들이 가득했다. 책을 읽으면 빨리 그다음 책이 읽고 싶었고, 눈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읽기 위해 항상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자곤 했다. 나에게 학교 도서관은 보물 창고였다. 그것도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마음껏 갈 수 있는. 그때 그 보물 창고는 금은보화 대신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사춘기 아이의 마음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출판의 위기는 출판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진실이다.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가 수시로 생겨나는 사회에서 오래된 종이책이 외면 받는다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글이 언젠가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될 날을 고대한다. 그럼에도 나는 서점에서 기쁜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기어코 소장하고 마는 낭만을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유구한 종이책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염원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도 종이책이 외면 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주고 싶어 했다. 그 누군가는 <라스트 북스토어>라는 전시로 자신의 염원을 시각화했다.

 

 

K현대미술관_라스트북스토어_포스터.jpg

 

 

<라스트 북스토어>는 책을 소재로 한 전시다. 이렇게 딱딱한 설명으로만 접하면 책이 전시된 일반 서점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이 전시된 것과 책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전시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라스트 북스토어>는 기존 서점에선 서가나 평대에 고정된 존재였던 책을 매개로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형태의 예술을 보여준다. 전시의 이름대로 지구 최후의 서점이라면 이 정도 상상력은 발휘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지닌 습관 중에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일차원적인 것이 있는데, 나는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보면 눈을 크게 뜬다. 눈 크기가 시력과 비례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꼭 눈을 크게 떠야 대상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기분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랬다.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 눈을 크게 뜨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책의 향연이 너무나 황홀해서 전시장을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 더 확실하게 느끼고 싶었다.

 

여러 예술품 중 책으로 만든 집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 동화에서 본 과자로 만든 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좁은 책의 집에 조심스레 몸을 넣자 벽돌처럼 집을 이룬 책들 한 권 한 권 눈에 들어왔다. 소설에, 잡지에, 학술 보고서까지 정말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집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책이든 베스트셀러와 아닌 것으로 구분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모든 책이 골고루 존중받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책의 낙원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집.jpg

 

 

요즘 내가 책을 대하는 마음이 중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세상에서 책 읽는 게 가장 재밌었던 그때처럼 글자를 읽어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다시 돌아왔다는 건 떠났었다는 뜻을 내포한다. 성인이 되고 갑작스럽게 쾌락을 허락받은 나에게 세상은 책 말고도 얼마나 즐거운 게 많은지 알려주었다. 힘들게 생각해야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는 독서와 다르게 영화, 드라마, 영상, 게임, 술자리 등등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쉽고 빠르게 나를 만족시켰다. 심각한 얘기만 가득한 책은 순식간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랬던 내가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심각한 건 질색이라던 내가 다시 생각에 잠긴 채 책을 읽고 있다. 진짜 심각한 건 즉각적인 쾌락에 가려진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차오르는 사회의 불안은 지상까지 침범했다. 눈을 감은 채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불안해하는 것보다 눈을 뜨고 그것을 직시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다시 책을 읽었다. 다시 세상과 만났다. <라스트 북스토어>는 그런 나와 책의 재회를 축복해주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전시장이미지6.jpg

 

 

<라스트 북스토어>에 가기 전, 에세이 한 권과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이 왠지 모르게 들떴다. 실화와 허구의 이야기를 잔뜩 접한 영향인지 내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세상을 이루는 최소 단위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버스를 타다 문득 언젠가 책에서 본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매일 새롭게 쏟아지지만, 여전히 이야기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아직 적절한 언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에 금기시되었던 소재가 지금의 주류로 떠오르는 것처럼 결국에는 모든 것들이 이야기로써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그런 생각에 한참 골몰해 있다 전시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모든 것이 이야기된 세상을 마주했다. 최후의 서점에서만큼은 우리 모두 이야기가 될 것이다.

 

 

*

 

라스트 북스토어(The Last Bookstore)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서점-

 

 

일자 : 2021.01.05 ~ 2021.06.06

 

시간

10:00 ~ 19:00

(입장마감 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K현대미술관

 

티켓가격

성인 15,000

청소년 12,000

어린이 10,000

 

주최/주관

K현대미술관

 

관람연령 

36개월 이상 관람 가능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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