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가 [문학]

안톤 체호프의 <내기>를 읽고.
글 입력 2021.02.0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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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 소설가 겸 극작가인 그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다. 그가 창작한 단편 소설이나 희곡은 너무도 유명하기에, 아마 많은 이들이 쉽게 접하거나 읽어보았을 것이다. 나도 일 년 전쯤에 지역 극장에서 연극 <세 자매>를 상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러 간 적이 있다.


<세 자매>는 희곡 안에 ‘현대 가정’의 모습을 자주 그려내었던 체호프 특유의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요즘의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단출한 무대에서 배우들의 대사와 움직임을 위주로 상황을 그리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인간들과 그들이 영위하는 삶의 단편을 극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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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 자매>(광주시립극단)

 

 

<세 자매>를 연극으로 본 이후, 나는 안톤 체호프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다가 <내기>를 읽게 되었다. <내기>는 단편 소설답게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소재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는데, 읽는 동안에는 술술 읽혔으나 결코 쉬운 작품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기>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나의 생각과 질문을 추가해 글을 써보려 한다.


<내기>에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나이 든 은행가와 젊은 변호사다. 이 둘은 사형제가 낫냐, 종신형이 낫냐를 비교하며 말싸움을 벌인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도 논쟁거리가 되는 부분이지만, 이 논쟁 이후로 두 사람이 벌이는 일이 다소 황당하다.


은행가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을 가두는 것이 사형보다 더 비윤리적이라 주장했고, 변호사는 이를 반대하며 종신형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의견을 증명하고자 변호사는 스스로 골방에 갇히기를 자원하고, 15년간 고독 속에서 버틴다면 은행가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을 받기로 계약한다. 그렇게 이 둘의 내기는 시작되었고 변호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나 목소리를 보지 못한 채 수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자발적인 수감 생활을 지속하는 변호사는 세월에 따라 점차 변하는데, 독자로서 나는 그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 극단적인 생활 환경을 직접 선택한 변호사의 모습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진짜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솔직히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구속되기로 마음먹은 변호사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떠한가?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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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 <내기>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나는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설과 같은 조건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안정이 있을 때 생각보다 쉽게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는 학생들의 흔적이 짙게 밴 고등학교. 그곳에서는 선후배가 마주치면 서로 고개 숙여 꼭 인사를 했다. 이것은 교칙 어디에도 없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문화’였다. 선배들은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은 후배에게 쓴소리했고, 교사들은 이것이 입학사정관이나 학부모의 방문 시 자연스레 인사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좋은 문화라고 여겼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1학년 신입생들은 이 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였고, 이후 2학년이 되어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은 후배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3학년이었을 때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정기적으로 학급별 대표들과 회의를 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회의 도중 한 1학년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인사는 상호 존중의 표시인데, 마주치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우리 학교의 문화는 매우 억압적이고 사라져야 할 악습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당황했고, 2, 3학년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욕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그 후배처럼 인사 문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학생이었기에, 후배의 발언에 힘입어 이 문화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도 이 생각에 동의할 것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대부분 신입생 시절에 ‘상대방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에 대한 자유를 포기하고, 집단 속에 동화되어 일면식도 없는 선배에게 억지로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적어도 나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인사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소수의 학생이 있었다. 위 단락의 1학년 후배가 그 소수에 속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이런 학생들은 대개 무리에서 ‘이상한 놈’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신입생 시절의 나 또한 모난 돌이 되기 싫었고, 이 문화 안에서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살다가 3학년이 되어서야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학생회 부회장으로서 인사 문화의 불필요성을 주장한 일은 생각보다 학생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2학년들 중 선배가 되어 인사를 받고 싶었던 학생들은 나에게 ‘그동안 선배로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이상한 짓 한다.’라고 말했다. 이 학생들은 선배로서 후배에게 인사를 받는 일이 그들의 권리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3학년 학생들도 조용히 학교를 졸업하기를 원했고, 1학년 학생들은 거의 아무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공론화의 장을 만들면 ‘인사의 자유’를 보장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테지만, 학생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고 그동안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자 했다. 나는 이 점에서 사람은 비난과 스트레스를 피하고 안정감을 얻기 위해 자유를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기>에 등장하는 변호사는 조금 다르다. 그는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고 수인(囚人)이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것이 대중의 힐난을 피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아주 큰 이득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갇힌 상태로 보낸 15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죽음 앞에 모든 것이 허망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주 큰 이득을 얻는 것’보다 ‘자유를 찾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고, 자신이 갇혀 있던 조그마한 바깥채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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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는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죽음과 허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변호사는 돈의 소유보다는 자유를 얻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고, 인사에서 상호 존중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안정된 생활보다는 인사의 자유를 얻는 것을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에게도 정확한 이치보다는 적당한 편리에 끌려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개인에게 자유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고, 그 순간에 무엇이 우선이고, 옳은지에 대한 결정은 개인이 직접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본인에 의해 억압과 통제가 선택될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쟁취하려면 생각보다 큰 책임의 벽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단조로운 인생’, 혹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조금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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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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