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윤희에게'가 주는 여운을 맛보며 [영화]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글 입력 2021.02.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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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종일관 고요하다. 극적인 사건도 없이 조용히 사람의 멱살을 움켜쥔다. 일반적인 영화의 호흡도 아니다. 영상인데도 만화의 컷처럼 뚝뚝 끊어져서 뭔가, 했더니 영화 내 나오는 필름 카메라다. 필름 카메라가 순간을 담아내듯 영화 역시 순간을 담아냈다. 스무해를 지나온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이 교복을 입고 학생 연기를 하지도, 아역을 쓰지도 않았다. 윤희가 찍어준 쥰의 사진 한 장, 엄마의 편지를 몰래 가져가서 낭독한 새봄의 교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편지의 나레이션, 그 정도 장치만으로 이십년 전과 지난 이십년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장면은 많다. 고모가 쥰에게 안아보자며 팔을 뻗는다. 쥰은 뭐야, 하고 어색해하며 점차 다가온다. 그러다 컷. 그 다음은 고모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이제 다른 장면으로 전환된건가, 싶더니 쥰이 와락 안긴다.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준과 윤희의 편지 역시 몇 장면에 걸쳐 나레이션된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다소 불친절한 편에 가깝다. 이 정도면 됐지, 혼자서 이해할 수 있지. 최소한의 정보를 최소한의 컷으로 관객에게 쥐어준다. 개념만 던져주고 응용 문제를 풀라고 하는 꼴이다. 물론 뒤에 답은 나온다. 답이 나오기 전까지 관객은 긴장하며 혼자 추리를 해야한다. 눈치가 빠르거나 영화를 많이 본 관객이라면 뻔하겠지만, 내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술 먹고 불쑥 불쑥 찾아오지 좀 마, 새봄이 봤으면 이제 가. 난 당신이 이럴 때마다 무서워.’ ‘여기 영양제 좀 사왔어.’ 새봄이가 경찰서를 찾아가 아빠, 하고 툭 던지기 전까지 둘의 관계를 유추할 수는 있어도 확신할 수는 없다. 새봄이가 아빠를 찾아갔을 때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새봄이와 아빠의 대화를 기다려주던 여자가, 아빠가 ‘잘 해줘야’하는 여자인지는, 적어도 나는 새봄이가 말하기 전까지 유추할 수조차 없었다. 이 영화의 호흡이 빠른가, 느린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클로즈업 한 장면을 자세히, 천천히 보여주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관객이 만들어가야한다.

 

*

 

곱씹어보고 싶은 대화들이 많았다. 영화관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vod를 사서 멈춰가며 대사를 받아적고 싶은 영화다.

 

대구, 혹은 대조를 이루는 대화들이 있다. ‘그거 다 빚이야.’ 삼촌이 새봄에게 해주는 것이 전부 빚이라고 윤희는 말했고, 엄마가 저에게 해주는 게 전부 빚이라고 새봄은 말한다. (물론 새봄은 진심이라기보다는 받아친 것으로 보인다.) ‘압수야.’ 윤희는 새봄의 라이터를 압수했고, 새봄은 경수의 담배를 압수했다. 윤희가 라이터를 앗아간 이유는, 엄마에게 나도 담배 하나 달라고 해서 (우리나라 정서상 어른과의 맞담배는 허용되기 어렵다.) 이다. 새봄은 피지도 못하면서 왜 시도하냐며 경수의 담배를 앗아간다. (내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가득 찬 인간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새봄이 한 살 많은 남자인 경수에게 담배를 배웠을거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하는 순간도 몇 번 있었다. 이혼한 부모님을 따라간 이유가 그렇다. 쥰은 아빠가 자기에게 무관심해서 아빠를 따라갔고(사실 엄마가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며 본인을 비하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새봄은 엄마가 더 외로워보여서 엄마를 따라갔다. (말을 건네는 사람은 새봄인데, 정작 새봄은 포커스 아웃 되어있고 윤희의 감았다 뜨는 눈, 움찔거리는 손가락, 미세한 표정 연기에 집중되어있다. 윤희는 새봄이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새봄은 이때 윤희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게 아니었어, 나는 짐이었어, 말을 하는 새봄의 마음과 그 말을 듣는 윤희의 마음은 어땠을까. 말하게 되는 순간 이제까지의 관계가 바뀌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것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쥰의 말마따나, ‘참을 수 없어져서.)

 

옛 연인에 대해 묻는 질문에, 윤희는 ‘가까이 가면 좋은 냄새가 났어.’라고, 쥰의 고모는 ‘가까이 가면 화장실 방향제 냄새가 났어.’라고 답한다. (새봄과 쥰은 ‘어떤 남자였어.’라고 묻지 않고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다. ‘여자친구/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이 폭력적이라는 담론에 동의하지 못했던 나지만(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다면 건넬 수 있는 스몰토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보여준 세심한 배려가, 다정함이 좋았다. 창작은, 예술은, 한 사람이 창조해낸 세계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써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쥰을, 윤희를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쥰의 고모는 어디까지 알고 편지를 보냈을까. (우체국을 지나쳤다가 다시 되돌아가 편지를 우체통에 넣은 것, 우편을 못봤냐는 쥰의 질문에 모른다고 거짓말한 것, 고등학교 시절 쥰의 사진을 꺼내 만져본 것을 보아 쥰과 윤희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 적어도 쥰은 지금도 윤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쥰의 편지가 고모에 의해 윤희에게 전달이 됐듯, 윤희의 편지는 새봄을 통해 쥰에게 전달되리라 믿는다. 혹은, 마지막에 윤희가 보여준 웃음-용기를 보면, 윤희는 직접 우체통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과다한 정보를 꼭꼭 씹어 떠먹여주는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정량에서 조금 못미치게 준다.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나오는 물이 아니라,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길 애타게 기다려야하는 산 정상에서의 약수터 물이라고 할까. MSG가 넘쳐나는 지금, 담백하다 못해 싱거웠다. 쥰과 윤희가 만나 오랜만이네, 하며 길을 걷다 화면이 까매지는 장면에서, 진심으로 여기서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제발요, 감독님. 만약 여기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속편이 나올 때까지 1인 시위라도 할거예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도 까만 화면은 달로 넘어가며, 윤희와 쥰이 아닌 쥰과 고모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둘이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회상할 것이라고도, 회상씬이 나올 것이라고도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눈이 언제쯤 그칠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해보는 말을, 처음에는 고모가 하고 쥰은 그것에 대해 왜 그런 말을 하냐했다. 하지만 윤희를 만나고 난 후의 쥰은 저 말을 한다. 이루어지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덧없는 소망, 정도가 아닐까.

 

*

 

화장을 하지 않은 윤희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좋았다. 캐릭터의 성격상 화장을 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진다. 윤희는 쥰을 보러 집까지 찾아갔다가 (카드가 하나 끼워져있는 다이어리 케이스에서 소품팀의 철저한 고증을 느꼈다. 내가 아는 모든 엄마들은 다이어리 케이스를 쓴다.) 결국 도망쳐 숨고, 택시에서 눈물을 흘린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러내리는데 장갑으로, 손으로 기어코 그 눈물마저 닦고 만다. 그 장면을 연기하는 최고의 모습이었다.

 

윤희는 소리 내 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청첩장을 들고 찾아온 인호가 ‘행복해야해. 꼭.’이란 윤희의 말에 울어버리는 것과 대비된다. (영화 보는 내내 내가 아는 사람인데 누군가, 누군가 했더니 유재명이었다. 비밀의 숲에서도, 라이프에서도 봤는데 엔딩 크레딧의 이름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 이혼했냐는 새봄의 질문에, 담배를 피고 싶어 사탕을 꺼내 물다가도 다시 뱉고, ‘너네 엄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 라는 대답은, 꼭 윤희가 인호를 사랑하지 않아서, 오빠가 억지로 시킨 결혼이라서 그런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물론 앞의 두 가지 이유가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란 건 아니다.)

 

윤희와 쥰은 사랑했었고, 이십년간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처음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의 연기는 훌륭했다. 깜빡, 하고 꺼지는 조명 역시 관객의 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분량만 놓고 봤을 때는 새봄이 더 많을지 몰라도, 김희애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새봄 역의 배우분 역시 훌륭한 연기를 했다! 다만 대본이나 감정선자체가 윤희에게 치중되어있는 것뿐이다. 제목부터가 윤희에게,지 않는가.))

 

*


추신 하나. 영화를 보는 내내 조용한 긴장감이 있었고 -아내가 억지로 끌고온듯한 남편의 코고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것같다.- 여러 관계를 보여준다. 엄마와 딸, 고모와 조카, 이혼한 부부, 재혼한 부부, 이혼한 부모와 자식, 연인, 첫사랑, 옛사랑, 짝사랑... 그리고 영화의 색채는 기어이 관객에게 덧씌워진다. 내가 보내지 못한 편지, 나와 엄마, 나의 첫사랑... 영화가 끝난 뒤 홀린 듯 리뷰며 해석이며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게 되는 영화가 있는가하면 (마블의 어벤져스-엔드게임이 그랬다. 영화가 끝나도 영화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채 올라가기도 전에, 기차 창문 너머 풍경을 보면서도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윤희에게, 는 당연 후자다. 이 여운이 가시고 나면, 내 보내지 못한 편지를 다시 꼬깃하게 접어 서랍 속에 쑤셔박고 나면, 그제야 영화에 대해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추신 둘. 세상에는 많은 차별이 있다. 내가 지금 차별이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인권이 더 발달한 미래에는 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겠지. 이 영화는 만연하는 차별을 담아낸다. 숨겨야 하는 것은 끝까지 숨겨요, 쥰이 료코에게 고백하지 말라며 건넨 한 마디는 배려였을까 이기심이었을까. 영화는 퀴어를 특별하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을 보여줬다. 새봄이 내내 들고다닌 카메라는 당시 남녀 차별의 상징이었다. (대학을 못간 똑똑한 여동생과 혼자서만 대학을 간 오빠라니, 굉장히 흔한 일이지 않은가. 엄마가 아빠 몰래 사준 사진기로 보아 사진을 좋아했던 건 윤희인듯한데, 오빠가 사진관을 하고 있는건 또 무슨 뜻일까.) 오빠가 소개해준 일자리는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떠날 거란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른다. 윤희가 내민 봉투에 부디 필름 인화값만 들어있길 바란다.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는 잘리기 전에는 쓰지 못한다. 영양사님, 저번에 못간 휴가... 어떻게 안될까? 언니, 나 배신감 들려 그래. 물론 영양사는 갑이 아닌 ‘을’이나 ‘병’정도 되겠다. 윤희가 ‘정’일 뿐이지. 권력적 수직관계가 바뀌게 되는 날은 올까.


추신 셋. 윤희가 바라본 기차가 단순히 멀리 떠나는 것, 윤희와 새봄을 싣고 가는 것을 넘어섰다고 하면 어떨까. 윤희는 기차를 볼 때마다 뛰어들고 싶던 걸지도 몰라, 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되고 왜곡된 시선이겠지. (제제가 뽀르뚜깔한테 기차에 치여 죽고 싶다고 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으나, 온전한 거짓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어느 정도는 본심이 섞여있었을 테니까. 아닌 걸 알면서도 밤새 기차를 감시한 뽀르뚜깔처럼, 나는 자꾸 불안한 마음으로 기차를 보게 된다. 윤희가 뛰어들까봐. 기차에 뛰어들고 싶은 건 윤희가 아닌 나일지도 모르겠다.)


추신 넷.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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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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