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 Part 1 [사람]

괜찮은 빌런 이야기
글 입력 2021.02.0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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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참 괜찮은 말이다.

 

- 이건 어떤 것 같아요?  - 오, 괜찮아요.

- 죄송합니다.  - 괜찮아요. 다음부턴 잘하면 되죠.


‘괜찮아요’에는 따뜻함과 너그러움이 묻어 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듣게 된 중년 남성의 ‘괜찮아요’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묻어 있었다.

 

*

 

나는 내가 아끼는 예술 영화관에서 매주 검표를 돕고 있다. 매 회차 평균 30명 정도 관람하는, 사실 그마저도 단골 고객이 대부분인 영화관이다. 표를 검사하고 발열 체크와 QR 체크인을 안내하며 원활한 정시 상영을 돕는 게 내 업무다. 별거 없는 일이지만 나름 애정과 사명감을 느끼며 일하고 있다.

 

영화관은 각양각색의 관객들이 찾는다. 청소년 할인을 받는 사람부터 경로 할인을 받는 사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외국인 관객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영화관도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라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곳은 문화 애호가들이 주로 찾는 곳답게 진상이 많은 편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날따라 유독 잔잔하긴 했다. 어쩔 수 없이 매번 해야 하는 QR 체크인을 "왜 또 해야 하냐"면서, 엄한 나에게 눈총을 쏘며 말하는 관객도 없었다.

 

마지막 영화가 시작하고 3~4분쯤 흘렀을까. 하루가 부드럽게 끝나갈 무렵, 한 관객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늦어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여유롭게 땅에 굴리며 내게 왔다.

 

나는 그 중년 남성 관객을 재촉할 겸 입장 안내 멘트를 했다.

 

“xxx 영화 입장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확고했다.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건들거리는 동작으로 티켓을 건넸다. 늦게 도착한 다른 관객들과는 달랐다. 마음은 급한데 몸은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늦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QR 체크인까지 마치고 입장을 시키려는데, 그는 멈칫하며 물었다.

 

“근데 여기, 화장실은 어디예요?”

 

말투까지 특유의 건들건들함이 전염된 듯했다.

 

“저쪽으로 쭉 가시면 나와요.”

 

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몸을 화장실 쪽으로 홱 틀었다. 영화는 이미 상영 중인데… 혹시라도 광고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그의 걸음을 붙들며 말했다.

 

“영화는 광고 없이 정시 상영하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그는 괜찮다는 말만 남긴 채 화장실 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처음 그의 여유를 보았을 땐 황당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당 영화는 객석의 절반 정도가 무료로 배포되는 초대석이었고, 그 사람도 초대권을 받아서 별 기대 없이 온 것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티켓을 검사할 때 유심히 본 결과, 티켓에는 직접 예매한 사이트가 또렷하게 인쇄돼 있었다.

 

이런 관객은 처음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우선 그는 '평범한 관객'은 아니었다. 예술 영화관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진상'인가? 그를 진상으로 분류하기엔 진상력이 부족했다. 그가 내게 불쾌한 행동을 하진 않았고, 뒷문으로 조심히 들어가기만 한다면 다른 관객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

 

다시 그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본인이 영화를 예매했지만 예매해놓고 흥미가 점점 떨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다른 사람이 예매했다가 시간이 안 돼 양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지인 작품이 후반에 상영돼 그것만 보러 온 걸 수도 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애써 상상을 더해가며 그를 변호하고 있을 때, 그는 슬그머니 다시 나타났다.

 

**

 

극장에서는 지연 입장하는 관객들을 뒷문으로 보내 객석에 있는 관객들의 환상을 지킨다.

 

 

스크린.jpg

 

 

쉽게 말해 위의 사진('라라랜드' 스틸컷)과 같은 상황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영화에 빠져든 관객들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영화가 시작했으니 '뒷문'으로 가셔야 한다고 안내했다. 친절히 뒷문을 가리키는 손짓까지 더하면서.

 

"뒷문으로 가셔야 해요."

 

"알겠어요."

 

하지만 남자는 나를 지나쳐 그대로 앞문으로 돌진했다. 미리 이동 경로가 설정된 기계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황한 나는 오른팔을 뻗어 문을 못 열게 막은 다음 빠르게 말했다.

 

"아니, 뒷문이요. 뒷문!"

 

"네~ 뒷문."

 

뒷문이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앞문을 파고들었다.

 

내 오른팔은 중년 남성의 확고한 의지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힘겨루기도 해보지 못하고 문은 가볍게 열렸다. 순간, 바깥세상과 극장을 분리하는 커튼이 시원하게 젖혔고 어두운 공간에 앉아 있는 관객들이 보였다. 남성은 유유히 객석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체할 틈도 없이 황급히 커튼을 치고 문을 닫았다.

 

잠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그 남성이 (아마도 뒷문까지 가기 귀찮아) 스크린과 가까운 문을 열었고, 극장엔 빛이 새어 들어갔다.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들의 얼굴도 보였다. 안과 밖. 기어코 분리시켜 놨던 것이 연결돼 버렸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니 검고도 진득한 것이 스쳐 간 것처럼 불쾌해졌다.

 

화가 났다. 내가 무시를 당했을 때보다 더. 나를 무시하는 건 용납할 수 있어도 영화가 무시당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암실 속에서 환상 세계에 빠져든 관객들은 후광과 함께 등장한 '빌런' 때문에 몰입이 산산이 조각났을 것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를 더 전투적으로 막지 못해서.

 

그리고 분노에 찬 확신으로 그를 다시 정의했다.

 

그는 진상이다. 늦은 게 죄는 아니지만, 다른 관객의 환상을 깬 건 죄다.

 

 

(Part 2로 이어집니다.)

 

*글 제목은 책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에디터태그.jpg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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