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국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 – 스위트홈 [드라마]

언제나 그랬듯 넷플릭스는 시즌 2를 준비하라
글 입력 2021.01.2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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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실 좀비물 좋아해요.
크리처물도 좋아하고요.”
 


이 말을 꺼내면 많은 사람이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그저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솔직한 답변을 꺼냈을 뿐인데, 오답을 말한 것만 같다. 이 때문에 기괴한 생김새의 괴물을 사랑하고 유혈이 낭자한 살육 현장을 즐기는 괴짜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생과 사를 오가는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처연하게 몸부림치는 인간들이 함께 연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종의 통찰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런 표현도 조금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왜 좀비나 괴물이 나오는 이야기에 유독 애정을 느낄까. 좀비 콘텐츠의 대명사 격인 <워킹 데드>나 <28일 후>부터, 엄마가 좀비가 되어 펼쳐지는 이야기를 발랄하게 담은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 개봉한 이후 몇 번이고 다시 본 한국형 좀비 영화 <부산행> 등. 지금까지 본 것들을 합쳐보니 양이 꽤 많았다.

 

 

영화 부산행.jpg

(영화 부산행)

 

 

‘좀비물’, 혹은 인간을 노리는 괴물이 등장하는 ‘크리처물’에서는 대재난이 휩쓸고 간 아포칼립스 세계관이 주를 이룬다. 이곳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발휘하여 공포의 무언가에 맞선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규율이 존재한다. 당연히 필요하기에 있는 것들이겠지만, 법이나 질서는 실체 없는 사슬과 같기에 생각보다 쉽게 없어질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가진 재산, 사회적 역할 또는 지위를 묶어주는 사슬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의 구속이 풀린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은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자리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다. 어제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죽음이 오늘 내 눈앞에 와 있기에 미래를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상의 세계를 상정하여, 그 안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배치하는 것이 좀비물(크리처물)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여기에 인간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생물체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면 시청자들이 느끼는 공포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




죽어버리거나, 괴물로 살아남거나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스위트홈> 또한 전형적인 크리처물 장르에 속하지만, 좀비나 괴물을 다룬 기존의 콘텐츠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설정을 기반으로 한다. 바로 인간의 특정한 ‘욕망’이 극대화되어 평범한 사람을 괴물로 변하게 한다는 것이다. 괴물로 변하기 시작한 사람은 과도하게 코피를 흘리다가 점차 괴물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는 동명의 원작 웹툰에서 다루었던 설정을 그대로 적용하여 창조한 세계관이다.

 

 

스위트홈 포스터1.jpg

 

 

<스위트홈>에서만 존재하는 이 독창적인 설정은 크게 두 가지의 매력적인 특징을 가진다.

 

첫째, 괴물의 외형과 능력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눈알 괴물’처럼 공격성이 낮은 괴물이 있는가 하면, ‘근육 괴물’처럼 인간이든 괴물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괴물도 존재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이 개인마다 다르기에 괴물의 생김새와 능력이 무궁무진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정형화된 좀비나 괴물의 유형을 벗어나기에 더욱 긴장감 있는 연출과 구성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장치이기도 하다. <스위트홈>에서는 특수분장과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원작 웹툰에 등장하는 여러 괴물을 구현해냈는데, 이를 통해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작품이 등장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둘째, 누구나 괴물로 변할 수 있다. 보통 일반적인 좀비물의 경우에는 ‘좀비에 물렸을 때’, 혹은 ‘좀비의 혈액이 체내에 들어왔을 때’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하지만 <스위트홈>에서는 마음속 욕망이 극대화되어 괴물로 변하는 것이기에 누가 괴물이 될 것이라고 특정하여 예상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작품 속 주요 배경이 되는 아파트에 고립된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는데, 때로는 불필요한 반목과 싸움도 벌어진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낸다. 다소 보편적인 전개이긴 하지만, <스위트홈>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괴물과의 사투와 생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고 함께 협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매력적인 구성, 다소 아쉬운 군상극의 맹점



나는 <스위트홈>의 원작 웹툰을 정말 재밌게 감상했기에, 드라마 또한 큰 기대를 안고 보았다. 물론 웹툰에서 장편 드라마로 매체를 옮겨왔기에 서사 구성과 캐릭터 구축에 여러 차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웹툰 원작자가 연출가에게 후반부 줄거리의 흐름이 원작과 다르기를 요청했기에 두 작품의 구성은 조금 다르다) 그렇기에 드라마에서는 웹툰과 또 다른 매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감상한 이후에는 나름 만족스러운 작품을 보았다고 느꼈다.


우선, 전체적인 구성이 훌륭하다. 원작 스토리가 워낙 탄탄하기에 드라마 속에서도 <스위트홈>만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구축했다. 원작과 비교하면 괴물의 등장 빈도가 낮아 긴장감이 덜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간간이 나오는 괴물의 CG 처리는 꽤 자연스러웠으며 괴물과의 전투 장면도 긴장감 있게 연출하여 ‘보는 재미’를 이끌었다.

 

 

근육괴물.jpg

(스위트홈 속 '근육 괴물')

 

 

지속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도해야 하는 장편 드라마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법이 ‘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인데, <스위트홈>에서도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라고 외치며 ‘다음 화 재생’을 누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는 대부분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시청자들이 시리즈를 앉은 자리에서 계속 보게 만드는 것이 넷플릭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점도 있다. <스위트홈>은 매우 다양한 색깔을 가진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여 전체적인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가는 ‘군상극’의 형태를 가진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원작에는 없는 새로운 인물도 등장했고, 원작보다 비중이 늘어났거나 줄어든 인물도 있다. 제작진이 등장인물 간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 것이 느껴지긴 하나, 작중 주인공이자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차현수’의 분량이 충분하지 않다.

 

 

차현수.jpg

(스위트홈 속 '차현수')

 

 

차현수는 학교폭력을 당했고, 가족을 잃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하기까지 한 매우 비극적인 과거를 지닌 소년이다. 그는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이어가다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는 참상 속에서 점차 성장하기 시작한다. 타인을 외면하고 지냈던 그는 어느샌가 직접 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영웅적 면모를 보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차현수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장면이 적어 그의 내면이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직접 와닿지 않는다.


드라마 초반에서부터 차현수는 괴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처럼 괴물로 변하지 않고 인간과 괴물을 넘나드는 ‘반괴물’로서 존재한다. 괴물화 현상을 버틸 수 있는 특수한 감염인이 된 것이다. 원작 웹툰에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차현수가 내면의 괴물과 맞서 싸우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차현수가 괴물의 유혹을 버티면서 욕망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런 장면이 거의 생략되어 차현수는 보다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몰입의 맥이 끊기는 허점, 음악



<스위트홈>을 처음 보았을 때 놀라웠던 점은 영상의 ‘채도’가 눈에 띄게 높은 것이었다. 원작에서는 어두운 분위기를 담기 위해 흑백에 가까운 무채색의 그림체를 주로 사용했다면, 드라마에서는 마치 가상 세계를 보는 것 같은 선명한 색감으로 작품을 그려냈다. 이처럼 광택이 강한 영상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회를 거듭하며 감상하다 보니 나름대로 익숙해져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다만, 작품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해보니 아쉬움으로 남는 지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음악이다. 배경 음악 선정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스위트홈>에는 게임 대회인 ‘롤드컵’에서 사용되었던 ‘warriors’가 자주 삽입되었는데, 드라마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록밴드의 강렬한 음악이 몰입의 맥을 끊으며 집중을 방해했다.


물론 해당 곡의 가사와 제목이 상징하는 의미가 <스위트홈> 속 ‘괴물과 인간의 강렬한 사투’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정신없이 펼쳐지는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가사까지 해석할 여유가 없다. 배우가 내뱉는 대사부터 가수가 부르는 가사까지 감당하여 이해하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수 비와이가 부른 OST인 ‘나란히’ 또한 드라마의 전반적인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스위트홈 속 이은혁.jpg

 

 

서사를 다룬 매체에서 음악이란 정말 중요하게 사용해야 하는 도구다. 뮤지컬을 예로 들어보자. 뮤지컬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음악을 세밀하게 가공하고 짜 맞추어 사용한다. 인물의 감정부터 시간의 흐름, 사건의 경과까지 모두 선율과 리듬에 담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쉽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대사들도 모두 음표와 쉼표 위에 존재한다. 작곡가는 관객이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끔 최대한 이야기와 음악의 결을 맞춘다. 그만큼 음악의 사용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서사와 음악을 완벽히 결합하여 작품에 한껏 녹아들게 만든 사례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마블 스튜디오, 디즈니, 픽사 등 음악을 잘 활용하기로 유명한 제작사들에서 만들었던 음악을 떠올려보자. 음악과 함께 당신이 아는 영화 속 장면 또한 자연스럽게 그려질 것이다.


아쉽게도 <스위트홈>에서 사용한 음악은 작품에 녹아들기 어려웠다. 분명 나는 시청자로서 괴물과 싸우는 인물에게 감정을 몰입했지만, 음악이 나온 순간부터는 나 혼자만 그 상황에서 벗어난 듯 관조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몰입이 깨졌다. 부디 <스위트홈>의 다음 시즌부터는 화면으로부터 시청자를 떼어놓는 음악이 아닌, 화면 속으로 시청자가 들어가게 만드는 음악을 활용하기를 바란다.


*

 

비록 단점을 여럿 언급하긴 했지만, 전반적인 감상평을 내려보라면 나는 당당히 ‘만족!’을 외칠 수 있다. <스위트홈>은 ‘한국형 크리처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훌륭하게 개척했기 때문이다. 원작과 달리 드라마에서 새롭게 수정되거나 창조된 캐릭터들의 모습도 꽤 괜찮았다. 다만 나는 열린 결말을 크게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스위트홈>에서는 결말을 활짝 열고 끝내버렸다. 넷플릭스에서는 다른 콘텐츠들도 자주 결말을 열어버리고 끝냈던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듯 넷플릭스는 ‘시즌 2’를 서둘러 준비해주었으면 한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한 회를 보고 나면 계속 이어 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기 때문에, 흥행의 측면에서도 시청자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서는 작품 공개 후 4주 동안 전 세계 2,200만의 유료 구독 가구가 <스위트홈>을 시청했다고 밝혔으며, 영상 콘텐츠의 순위를 집계하는 사이트인 ‘FlixPatrol’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넷플릭스 티비 쇼 부문에 <스위트홈>이 3위를 차지했다고 알려졌다. (2020년 12월 21일 기준)


한국의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게다가 사람들과 싸우는 괴물이 등장하는 이 비현실적이고도 독특한 이야기를 전 세계에서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스위트홈>에 담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사람 사는 세상의 단면을 가장 극단적이자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증오, 탄생과 죽음이 오가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살아간다. 하지만 <스위트홈>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괴물’이라는 비일상적인 존재의 등장을 통해 신속하게 압축되어 이루어진다.


누군가 살아나면 또 누군가 죽어 나가는 곳.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자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아포칼립스. 시청자들은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이입했다가, 안타까운 희생이 벌어지면 함께 슬퍼하며 애도한다. 시청자들은 ‘오늘도 무사히 버텨냈다’라며 안도하는 <스위트홈> 속의 인물들에게 공감하며 자신 또한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비현실 속에서 현실을 찾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이자, 사람을 살려내는 이야기가 담긴 <스위트홈>의 세계가 앞으로 창조해낼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이남기.jpg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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