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겨울을 보며 떠오르는 단상들 [사람]

차가운 겨울바람에 묻어 있는 나의 이야기
글 입력 2021.01.1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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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헬스장에서 운동하러 가기 위해 가방에 텀블러를 넣었다. 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한 옷장에서, 즐겨 입는 짧은 반바지와 그림자처럼 보이는 검은색 티셔츠를 집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을까 가벼운 후리스를 입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서둘러 집을 나가라고 재촉하듯 아이폰에서 6시 30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에이 뭐, 별로 안 추워 보이는 데 괜찮겠지. 저번 주만 해도 후리스 하나만 입고도 잘 다녔잖아?"

 

따뜻한 패딩을 뒤로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과 다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추위보다 귀찮음이 더 컸던 탓에, 어차피 10분밖에 안 되는 거리니까 그냥 가기로 했다. 1분이 1시간 같았다. 바들바들 떠는 몸을 진정시키며, 헬스장까지 필사적으로 뛰어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겨울은 변덕이 심했다. 그리고 오늘, 온몸으로 한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나는 여름보다 겨울을 조금 더 좋아한다. 겨울이 주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질 때마다 묘한 설렘이 느껴진다. 겨울은 항상 내게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추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내 인생에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끝난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면서,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중요한 일 하나를 끝냈다는 후련함과 아쉬움이 가라앉을 때쯤, 새롭게 시작하는 일로 설렘과 열정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에게 겨울은 끝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이자, 후련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차가운 바람이 내 살갗을 스치고 가면,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또 하나 큰 고비를 넘겼구나.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다가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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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재수, 삼수

 

아마, 겨울을 특별하게 만든 일등 공신은 이 녀석들이다. 3년이나 수험생활을 하다 보니 몸이 절로 반응한다. 그 당시 수능은 내게 있어,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겨울은 삶이 끝남과 동시에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 수능 성적표를 받고서 괴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등산을 하러 갔다. 추위도 잊을 만큼 온몸에 땀 범벅이 되도록 쉬지 않고 산을 올랐다. 못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고 좋지 못한 결과에 서글펐다. 어쨌든, 끝났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했다.

 

그날 삼촌께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술 한잔 사주셨다. 추운 겨울, 삼촌과 함께 집 근처 막창집으로 갔다. 아늑하고 따뜻한 조명이 비치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 밖으로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고, 창문은 윙윙 울었다. 노릇노릇 막창을 구우며 소주 잔을 부딪쳤다. 오랫동안 삼촌은 묵묵히 나의 푸념을 끝까지 들어주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셨다.

 

"이제 그만하자. 할 만큼 했다. 대학이 인생의 유일한 길은 아니야. 세상에는 다양한 길이 있단다.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살고, 그 길을 찾아서 걸으렴"

 

그때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삼촌을 많이 좋아했던 탓일까. 오랜 수험생활에 지쳤던 탓일까. 덕지덕지 붙은 미련을 간신히 떼고서, 수능에 손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은 그해 가장 추운 날이었다. 그리고 내 생에 첫 대학 생활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수능이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걸 모두 깨달은 지금에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 때면 가끔 그 감정에 취하곤 한다. 그 당시 나에게 수능이라는 존재가 참 컸던 것 같다. 겨울은 문득 그때를 연상시킨다.

 

고소한 막창의 향기, 달콤했던 소주 한 잔. 아쉬움 반, 후련함 반. 나의 겨울바람엔 그런 것들이 묻어 있다.

 

  

군대 전역

 

2016년 봄, 군 복무 중이었던 나는 추위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쯤이면, 사라졌던 자유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달력만 쳐다보고 있기엔 너무 괴로워서, 글을 쓰기로 했다. 전역을 300일 앞두고, 매일 밤 글을 매개로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일기장 속에서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고, 같이 울기도 하고, 함께 웃기도 했다. 하루하루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매일 밤 일기장에 썼다.

 

아직도 2016년의 다이어리를 다시 보면 울컥한다. 너덜너덜해진 노트 속에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내가 살아있다. 내 뿌리가 어디인가, 가끔 길을 잃을 때 그 다이어리를 다시 펼친다. 겨울이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나를 만나기 위해.

 

2017년 1월 15일,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 생활이 드디어 끝났다.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다가올 새로운 도전에 설레는 마음으로 2017년 다이어리를 샀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글을 썼을 때, 비로소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도 역시 추운 겨울이었다.

 

 

대학교 졸업

 

졸업을 앞둔 2019년 10월에 취업을 하면서, 학교에 취업계를 냈다. 취업계는 4학년 2학기에 한정하여 취업한 사람을 대상으로 수업 출석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단, 반드시 과제는 제출해야 하며 중간/기말고사 시험은 모두 응시해야 한다. 수업이 2~3개밖에 없었고 학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아서, 수업을 직접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퇴근 후에 과제를 성실하게 제출하고, 연차를 내서 중간/기말고사 시험을 치러 갔다.

 

2019년 12월 18일, 추운 강의실 속에서 손을 떨면서 마지막 기말고사를 쳤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짧게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강의실을 나왔다.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분명 날씨 맑음이었는데… 왜 갑자기 눈이 오는 거야…"

 

눈이 주는 낭만보다 옷이 젖을 생각에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제때 알려주지 않은 기상청을 원망했다. 패딩으로 전신을 감싸고 주머니 속 손난로를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종종걸음으로 정문까지 걸어갔다. 정문을 나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내일도 이곳에 올 것만 같은데, 이제 학생 신분으로 여기 올 일이 없다. 그토록 바랬던 졸업인데,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누가 알았을까? 그게 내 졸업식이 될 줄은. 이후 코로나가 터지면서 모든 졸업식은 취소되었다. 덕분에 졸업식은커녕 졸업장 구경도 못 했다. 눈이 오던 그날이 바로 나의 졸업식이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또 하나가 끝났구나. 그리고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구나.

 

그날도 겨울이었다.

 

 

그리고 다시 오늘,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여전히 바람은 매섭고 차가웠지만, 햇볕은 따스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래도 이번엔 뛰지 않고 그냥 걷기로 했다. 패딩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보다, 겨울이 왔음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내 인생에 중요한 분기점마다 끝과 시작을 알리는 겨울. 섭섭함과 후련함이 공존하고,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하는 겨울. 나는 겨울이 참 좋다.

 

이번에도 역시 작은 도전이 끝났다. 2020년 여름에 첫 직장을 그만두고 반년 동안 힘든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 방황의 시간 속에서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었고,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정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좋은 기회를 만나 다시 취업하게 되었다. 새로운 직장의 첫 출근, 아트인사이트, 20대의 마지막, 다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겨울이 찾아왔다.

 

2021년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해다. 내가 스물아홉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서른이 코앞에 다가왔고, 새삼 살아온 날의 무게가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른다. 내가 아는 스물아홉의 형, 누나들은 참 멋있었는데, 나의 스물아홉은 어떨까. 멋진 스물아홉은 못 되더라도, 스물여덟의 나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빨리 오는 겨울이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한다. 이 설렘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내년에는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니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겨울이 왔다.

 

당신의 겨울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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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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