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공간의 점유를 둘러싼 욕망에 관해 – 도서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내 집'에 대한 비틀린 욕망
글 입력 2021.01.08 09: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x9791197024160.jpg

 

 

 

1. ‘행복 총량의 법칙’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고 믿곤 한다. 그런 탓인지 무언가를 손에 쥐기 위해선 이미 쥐고 있는 것 중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걸 구태여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가 많다.

 

이를테면, 갖고 싶었던 물건을 우연한 계기로 노력 없이 얻었거나 예상외로 특정한 영역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 희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끼니를 부실하게 먹거나 원래 사고 싶었던 다른 것을 사지 않거나. 예정된 것보다 더 많은 일이나 공부를 하는 등으로 선을 만든다. 너는 이만큼 이상으로 행복감을, 만족감을 누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령을 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렇게 내 ‘분수’를 스스로 규정하려 든다. 기이한 습관이다.

 

다시 말해, 고통을 ‘사전에’ 자처하는 성격이다. 여러 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형태를 구체화한, 내가 극복 가능한 크기의 고통을 삶에 먼저 끌어와 불행의 농도를 매번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고통에 둔감해지는 동시에 고통의 근원지로부터 나를 보호해 근본적인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벌써 이만큼이나 불행한 이런 고통까지 닥치다니, 라는 자기연민으로 나의 인격성을 최소한이라도 보호하면서 그런 불행이 주는 번뇌를 일상적인 것으로 체화하기 위함인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사느냐. 재질이 나쁜 내 습관을 설명할 때, 항상 듣는 이야기다. 즐거울 수 있는 만큼 즐거울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 왜 너를 스스로 바닥에 끌어내리려고 하니. 그만큼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고, 다가올 불행에 다시 익숙해지고 그것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을 상기시키려고 그런다, 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멋쩍게 웃기만 한다. 모든 상황이 다 좋게만 흘러가면, 익숙해진 즐거움만큼이나 좌절을 겪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관성이 줄어들 것이니까, 그런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말을 덧붙여도 별종이라는 시선이 돌아올 뿐이다.

 

 

 

2. 결핍의 문제


 

문제가 뭘까. ‘결핍’에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기 조심스러운 환경에서 자랐고, 그때 체득한 무력감과 비틀린 열등감이 이런 이상한 법칙을 내면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이때의 결핍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이 구매하는 것보다 조금 더 값이 나가는 물건을 고르지 못해 발생하는 다소 좁은 차원의 결핍이 아니다. 나만의 공간, 내 집, 내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평온, 보장받아야 할 존엄성의 부재처럼 넓은 차원의 결핍을 뜻한다. 그런 것들이 부족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가진 능력으로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마음을 늘상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 큰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감당 가능한 결핍을 삶으로 계속 끌어와 손에 쥔 것들을 끊임없이 재고, 재서 버리고, 보상 심리를 살찌우며 ‘언젠가 나는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걸 손에 쥘 수 있겠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상을 합리화한다. ‘궁극적’이라는 말을 쓰기에 내 바람은 조악할 가능성이 크고, 올바른 표현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남은 삶 동안 개중에서도 그나마 내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꼽자면, 주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궁극적 과제이자 바람으로 설정하는 수밖에, 내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방이 여러 개 딸렸다거나, 한강변 근처에 있는 근사한 아파트를 사고 싶다든지 등, 거창한 형태를 원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간섭을 일절 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 주기적으로 계약을 갱신하지 않아도 되는, 내 것들을 온전히 보관하고 장식할 ‘내 주거 공간’을 획득하는 것. 그것이면 된다. (실평수로 따지자면, 8평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1.5룸이면 더욱 좋을 듯하다.)

 

매일 그런 바람을 떠올리면서 버틴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른바 ‘현타’를 맞을 때면 죽기 전에 온전히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내면에 항시 자리하는 결핍을 해결해야 한다는 욕망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이 꿈을 실현하려면 내 행복의 많은 지분을 여기에 몰아넣고, 남아 있는 지분으로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는 어긋난 마음가짐을 가진 채.

 

 

 

3. 얄팍한 보상 심리



 

“무엇이 가난일까? 한강다리 위에서 아파트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 도시에 집 한 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마음이 저려왔던 순간을 가난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어떤 방에 살아보고 나서야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의 어눌함을 자책하던 순간을 가난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크레인이 밀어버린 쪽방이었다. …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 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pp.58-59.)

 


내 욕망은 얼마나 비틀렸을까? 인생의 초중반부를 넘어서야 겨우 실현할 기미가 보이는, 높다란 길이의 욕망을 삶에 끌어오기 위해서 내가 포기하는 것들은 그렇게 포기되어도 괜찮았던 걸까?

 

때때로 보상 심리의 정당성을 유지하고자 스스로를 체벌하려던 목적에 가까웠던 비상식적인 포기 행위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식생활을 포기하거나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행동은 과연 나의 궁극적인 바람에 비교했을 때 그렇게나 무가치했을까. 단지 이런 고통 속에서 헤매는 나야말로 욕망을 실현할 자격이 있다는 알량한 보호막을 만들기 위해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건 아니었나.

 

여기서 말하는 보상 심리란, ‘나는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왔고, 이를 극복하고자 절망적인 일상 속에서도 악착같이 노력하고 있으니 어떤 방법으로건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는 근거 없는 자세를 뜻한다. 순전히 나를 위한, 나만을 고려해 만들어 낸 유리막. 단단해 보이지만 주먹 한 대에 처참하게 깨질 가능성이 큰, 불안정한 욕망의 틀. 책을 읽으면서 마주친 것은 비틀릴 대로 비틀려, 더욱이나 스스로가 만든 법칙에 자발적으로 갇히려 애쓰는 나 자신이었다.

 

 

[이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