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은설(銀雪)"을 정의하는 중입니다.

글 입력 2021.01.0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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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을 했다. 생각보다 쉬운 결정이었다. 마음을 먹고 바로 실천에 옮겼고, 개명신청은 소문보다 훨씬 간단했다. 서류를 정리해서 직접 대법원 전자 소송을 진행했는데, 전 과정 통틀어 기다리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꼬박 3개월의 기다림 끝에 12월 10일 법원의 허가를 받았고, 결국 해가 바뀌기 전에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신분증과 여권은 폐기되었다. 핸드폰, 통장, 카드, 인증서, 학적부 등 전부 하나하나 수정해야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여전히 주민등록증이 나오지 않아 임시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고, 지갑 안에는 주민등록초본을 넣고 다닌다.


이름 세 글자 중 한 글자만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것을 다시 바꿔야 했다. 정보가 하나씩 변경될 때마다 지난날의 흔적을 지우는 기분이었다. 한 달 가까이 세상에 나를 지우고 새로 쓰는 일을 반복했다. 대부분의 내가 새 이름표를 달게 되었고, 이제야 조금씩 그 이름 세글자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개명 후 처음 하는 자기소개이다. 나는 이름에 나를 담고 싶었고, 대단한 사연은 없었지만 대단한 사건이 되길 바랐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를 소개하는 글이자, 나를 새롭게 정의하는 글이다. 내가 이름에 담고 싶던 내 모습과 담아가고 싶은 나를 모아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은설"의 첫 자기소개이다.

 

***

 

유례없는 폭설로 서울 버스가 마비된 날,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아직도 기상청에 들어가면 내 생일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은설"이 될 뻔했다고 들었다. 개명 허가를 받기 직전, 나는 하염없이 폭설이 내리는 꿈을 꾸었다. 밤새 눈이 내려 내 키를 넘어서까지 쌓이는 꿈이었다. 법원에서 개명 허가를 받던 날은 2020년 공식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렇게 나는 "은설"이 되었다.


눈을 보면 아이처럼 신나진 않았지만, 눈 오는 날은 기분이 좋았다. 눈을 수식하는 단어들을 좋아했다. 춥고 앙상한 겨울과는 역설적으로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게 괜히 마음을 설레게 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얼음 조각들이 예뻤고, 봄이 오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마법 같았다. 눈처럼 살고 싶었다. 나는 늘 눈 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눈의 역설


 

나는 이성이 강한 사람이다. 어릴 때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에 혼란을 많이 겪었지만, 그마저도 이성적 사고로 잠재우곤 했었다. 감정이 메마른 것은 아니다. 나는 눈물도 많고 감수성도 예민하다. 단지 논리와 사고를 통해 세상을 대하는 게 더 익숙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불편하다. 해를 거듭하며 사고가 유연해지고 있지만, 방식 자체는 더욱 굳혀지는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타인에게서 차갑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오히려 따뜻한 사람이란 평을 더 많이 들었다. 한창 MBTI를 얘기하던 때는 열이면 열 모두 내가 F일 거라 확신하기도 했다. 물론 T는 차갑고 F는 따뜻한 건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온도에 빗대면 그렇다고들 하니까 괜히 신기했다. 나는 8년 차 ENTJ인데, 항상 T가 제일 높게 나오는 전형적인 T형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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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고는 따뜻한 결론을 도출한다. 내 사고 알고리즘의 모토이다. 나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공감하고 표현하는 데에 서툴지만, 대신 심장이 느낀 것을 머리로 분석하고 이해한 것을 공유한다. 사고방식의 속성이 차가움이라 해도, 그를 통해 주변에 온기를 전달한다면 나는 충분히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나의 따뜻함이 좋다. 마치 한겨울의 눈처럼, 차가운 속성이 만들어내는 포근한 풍경이 좋다. 역설적이기 때문에 더욱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따뜻한 것들이 주는 당연한 감상과 다르게, 조금 더 특별하고 소중한 느낌이다. 타인이 내게서 온기를 느꼈다면, 나는 그만큼 따뜻한 사고를 거쳤다는 뜻이고, 그건 나의 커다란 진심이다. 추울수록 단단해지는 눈처럼, 그리고 눈 덮인 세상의 동화 같은 온기처럼, 아주 커다란 진심이다.

 


 

눈의 하강


 

최근 좌우명이 생겼다. 좋아하는 문장들은 많았지만, 좌우명으로 품고 싶은 문장은 찾지 못했었는데, 우연히 심장 뛰는 말을 들었다. "매몰비용은 기회비용에 불포함한다." 예상했겠지만, 경제학 강의 중 들은 문장이다. 예전에는 이해하기 급급해 지나쳤던 문장이었는데, 다시 들은 순간 내가 찾던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좌우명을 갖기 전에 가장 좋아하던 문장은 "Let bygones be bygones."였다. 나는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다짐 없는 후회와 미련은 그저 과몰입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사건에 현재의 감정을 쏟는 일은 지나친 낭비이다.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두고 사는 일이 버겁다. 회수 불가능한 가치까지 전부 안고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설 수는 없다. 머뭇거리는 사이 포기될 기회비용이 내게 더 중요한 가치일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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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하강의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폭우처럼, 누군가는 이슬비처럼, 또 누군가는 낙엽처럼 저마다의 행태로 떨어지겠지만, 나는 나의 하강을 눈에 비유하고 싶다. 적막한 하늘 아래 덤덤히 내리는 눈은, 먹먹하긴 해도 슬프지 않다. 기온이 오르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녹아 없어질 걸 알기에 그런 걸까. 하강의 이미지와 달리, 눈은 풍경을 해치지도, 세상에 생채기를 내지도 않는다. 눈이 녹은 자리엔 눈의 흔적이 없다.


그니까 나는 지난 순간들을 더는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환상처럼 녹아 없어진 시간은 제아무리 후회하고 매달려도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하강의 순간도, 한파의 계절도, 지나고 나면 전부 매몰비용일 뿐이다. 그 순간이 얼마나 애틋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 움켜쥐려 할수록 손에서 녹아내렸던 눈처럼, 나의 것이 아니었던 시간은 그저 매몰되어버린 기간비용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게 개명이 쉬운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은희"이기 싫었던 게 아니다. 지나간 시간으로부터의 도주를 꿈꾸며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면, 분명 더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은설"이고 싶었다. 내 삶은 늘 그랬다. 기회비용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늘 최선의 하루를 살고, 그건 오늘을 적어도 어제보다 나은 하루로 만들어준다. 적당히 비우고 과감히 버리는 게 내가 나를 사는 방식이다.

 

***

 

"은희"와는 아직 이별 중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은희"이기도 하다. 나를 "은희"로 알던 사람들에게는 앞으로도 "은희"로 남을 테고, 그건 꽤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오래 알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해 "은희"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은설"을 정의하는 중이지만, 그 역시 나고, 나는 앞으로 항상 "은설"일 테니 말이다.


새해가 밝았다. 모든 게 리셋되는 1월이다. 나를 재정비하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물론 어느 것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1월은 1월이다.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계절이다. 눈이 오면 좋겠다. 눈꽃이 보고 싶다. 더는 주민등록초본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될 날이 오면, 나는 조금 더 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나도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꽃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처음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썼던 "스물둘의 은희"가 생각난다. 나는 어느덧 "스물넷의 은설"이 되었다. 언제나 나를 소개하는 일은 긴장된다. 처음은 특히 더 떨린다. 나는 여전히 나인데, 소개할수록 자꾸만 낯설게 느껴진다. 어쨌든, 끝으로 정식 인사를 해보려 한다.

 

안녕하세요, 전문 필진 최은설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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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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