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낯설지 않은 디스토피아 - 화씨 451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1.01 12: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화씨 451』속 세상에는 책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어딘가에 소수의 책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책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은 불법이다. 책이 발견되면, 방화수가 출동해 책을 불태워버린다.

 

책이 없는 세상은 미디어로 가득 채워졌다. 단순하고 말초적인 정보만을 전달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떠들어대는 소리, 의미 없는 광고의 반복적인 메아리가 고요를 삼킨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 매일 벽면을 둘러싼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귀마개 라디오를 듣는다. 천천히 걷거나 산책하며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제트카를 타고 빠르게 달리며 광고판을 본다.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쾌락만을 쫓으며 살아간다. 타인에 대해 가십이 아닌 관심은 갖지 않으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없다. 사회와 권력에 대한 다양한 담론과 토론은 사라지고,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힘들고 괴로운 생각은 없고, 매일매일 즐거움만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삶이 행복한 삶인 것만 같다. 그 어디에도 질문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화씨 451』속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가 않다.

 

나는 학창 시절 한 학기에 한 개씩 언론정보 전공 강의를 들으며, 총 6개의 강의를 들었다. 매 학기 민주주의 언론은 어때야 하고, 민주주의 시민은 어때야하며, 정치권력은 어때야 하는지 배웠고, 관련 레포트 수십 개를 썼다.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많이도 떠들어대고 다녔다. 내가 쓴 글만 보면 나는 누구보다도 깨어 있는, 민주주의 시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겉만 번지르르했다.

 

나는 정치 뉴스 보는 것을 싫어했다. 전공 강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뉴스를 많이 보긴 했지만, 매일 서로 물어뜯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나고 머리가 아파졌다. 매일 새로운 사건 사고로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사회 뉴스도 좋아라 하지 않았다. ‘내 인생 살아내기도 바쁜데, 이런 뉴스까지 봐가면서 나를 힘들게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이렇게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던 와중에 『화씨 451』을 읽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화씨 451』의 세상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부조리가 넘쳐나지만 아무도 그 부조리가 부조리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상상 속 디스토피아 세상이 지금 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로 변해가는 세상에 체념하고 적응해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섬뜩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요. 대개는 침묵한 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해요. 이미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죠. 감옥의 이 방 저 방으로 옮겨다니듯이 이 교실 저 교실을 네 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녀요.

 

p.55

 

 

아무런 질문 없이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하는 학생들, 외모로 대통령을 뽑는 부인들의 모습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언론은 ‘왜?’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수많은 뉴스를 양산하고, 사람들은 뉴스에 ‘왜?’라는 의문을 품지 않은 채 소비하고 받아들인다.

 

방화서 서장 비티의 말처럼, ‘왜?’라는 의문을 품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험난하고, 두렵고,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진실은 때때로 불편하고 아프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는 단순하고 유쾌한 정보를 원하고, 그 뒤에 있을 진실을 향해 다가가지 않는다.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

 

아무런 질문 없이 단순해진 사람들은 쉽게 권력의 손에 놀아나게 된다. 권력은 무지하고 정치처럼 복잡한 것에 관심이 없는 대중을 좋아한다. 대중들에게 순간의 즐거움이 될 단편적이고 선정적인 정보를 흘려주면, 그들은 그 정보에 홀려 권력의 진짜 속셈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권력은 손쉽게 원하는 것을 얻고, 우리는 어렵게 쟁취했다 믿은 민주주의를 잃는다. 편안함과 쾌락만을 쫓으며 디스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

 

 

fire-1246522_640.jpg

 

 

『화씨 451』이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보다 더 무섭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질문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우리 앞에 가장 가까이 다가온 디스토피아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과 고민은 불안하고 불편하며 복잡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려움과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조리를 똑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삶을 향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디스토피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고 질문해야 한다. 질문이 있는 세상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