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감은 나를 살게 해줘 [사람]

글 입력 2020.12.2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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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준비하고, 연말을 기념하고, 지나온 한 해를 더듬어보는 일까지.

정신없던 12월도 끝이 보인다.


매년 연말은 준비, 기념, 정리를 요구하는 일정들이 한 달 동안 뒤섞여 마구마구 들이닥치는 탓에 모든 일을 제대로 소화하긴커녕 속절없이 그 풍파를 맞고만 있는 듯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다. 시간이 잠시 멈춘듯한 새벽, 올해는 잠에 들기를 조금 미루고서야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2020년은 나에게 어땠나.


 

기억에 남았던 어떤 추억이 올해의 일인지 작년의 일인지, 그런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데에 재주가 없는 편이다. 한 해의 시작과 마감 같은 것에 감각이 무딘 쪽에 가까웠다. 평소와 같은 날에 평소 같지 않은 고마운 말들이 오가고 어딘가 쑥스러워 어색하게 반응하는 나를 느낄 때면, 기쁘면서도 마음 한편이 짜게 식었다.

 

그 미지근함은 여러 통의 축하문자나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쁨을 시시한 일로 느껴지게끔 했다. 고마운 일을 고맙게만 받아들이면 안될까, 자책 섞인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런 날은 유독 집으로 돌아가는 뒷맛이 허무하고 씁쓸했는데, 그 길에 본 연말 옷을 입은 모든 상점과 가로수의 모습이 정말 예쁘면서도 어색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매월, 마감처럼 다가오는 각종 기념일을 D-day로 체크하던 나는 만약 기념일이 없어지더라도 그리 슬프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의미를 두려 하지 않았기에 무딜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어땠나. 보류와 취소가 밥 먹듯이 일어났던 2020년. 특히 여름은 무감동한 내가 실은 얼마나 이런 식의 마감과 시작으로부터 보살핌을 원하는 인간인지 눈물로 절감했던 날들이었다.


이 눈물의 시발점이 된 건 대충 개강할 시점부터였을까. 3월까지만 해도 개강이 2주 연기되는 정도로만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렇게 졸업 전시를 준비하던 내 마지막 학년의 시작도 어수선했다. 휴학 때부터 생각해왔던 졸업 작품에 대한 계획과 일정이 매번 바뀌었다. 당연히 그건 예고된 일이 아니었다.

 

오늘 상황을 보고 당장 내일 타격을 입는 식이었다. 당장의 타격이 내게 즉각적인 고통을 주진 못했다. 오히려 조금은 덤덤했던 것 같다. 그저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으로 모든 계획과 일정을 훅훅 바꾸었다. 당시엔 의연하게 대처해왔다고 판단했던 상황들이었으나, 원래 큰 충격으로 얻는 고통은 나중이 돼서야 찾아온다지 않나.

 

나는 한여름이 돼서야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꽤 오랫동안 아팠다.

 

 

 

“낙이 없네요.”


 

의사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을 계속 곱씹었다.

 

바로 다음 날의 계획이 파도 앞 모래성처럼 언제든 가볍게 무너질 수 있다는 그간 경험은 나를 매 순간 긴장케 했다. 급하게 다시 쌓아 올린 모래성이 자고 일어나면 무너져있을까 잠을 자지 않았고, 그 새벽엔 주로 울었다.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앞으로 얼마나 이런 불확실한 일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할까. 난 어떤 뼈대로 서 있는 사람일까. 앞으로도 설 수 있을까. 서야 하는 걸까. 지겹다고까지 생각했던 단단한 시작과 마감으로 처리된 계획들이 그리웠고, 또 간절했다.


극적인 변화는 없이 겨울은 왔다. 2021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언젠가 찾아왔을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내 주변의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다. 생활 반경이 점점 좁아지더니 결국 남은 이 방 한 칸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나를 바꾸는 일뿐이었다.


지인들과 약속이 매번 미뤄지고 확실시되지 못하는 시기에 각종 기념일과 연말을 기점으로 짧은 편지를 쓰고, 택배로 전할 선물을 골랐다. 약속은 몰라도 편지와 선물 정도는 내가 온전히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재미있는 이야기도 맘껏 할 수 없으니, 대신 보름에 한 번씩 이렇게 재미있다고 느꼈던 것을 주제로 글을 써 올리기 시작했다.

 

편지와 선물, 글 따위를 마감하는 일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확실한 이 작은 일들에 깊게 집중하고 있는 요즘이다. 덕분일까? 우는 날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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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했던 브런치 카페에서의 마지막 저녁

 

 

오늘, 2년 넘게 일해왔던 브런치 카페에 마지막으로 출근했다. 열심히 커피를 뽑고,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었다. 아, 그리고 일주일 전엔 코로나 치료 병동으로 이용된다는 기숙사 측의 공지에 따라 급하게 방을 뺐다.

 

줄곧 붙잡고 있던 일들이 띄엄띄엄 끝나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연말 기념으로 지인들에게 건네줄 선물을 골랐다. 그리고 그 중 또 몇 지인들에겐 한 해 동안 둘 사이의 끈끈했고 또 느슨하기도 했던 마음을 전해줄 단어를 신중히 골라 편지를 보냈다. 큼직한 일들이 떠나고 있지만, 여전히 내겐 작은 마감들이 있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내 영역을 떠난 일들이 많지만 떠난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마저 그대로 삼켜지지 않도록, 나를 나로서 있게 해줄 작은 시작과 마감을 계속 찾고 있다.

 

 

 

최혜민.jpg

 

 

[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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