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많은 의미들이 직조하는 침묵: Untitled [미술/전시]

때로는 '무'가 무수한 의미를 함축하고는 해
글 입력 2020.12.21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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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미술작품들 중에는 ‘무제’가 많다.

 
 
‘무제’ 작품이 늘어나고 있는 문화현상에 주목하며 그 까닭을 유추해보고자 한다.
 
‘무제’란 작가가 의도적으로 제목을 생략했거나 작품 자체의 제목이 ‘무제’임을 뜻한다. 제목은 본래 직관적인 언어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제목에 의미가 함축되는 것을 지양하고 무의 상태를 택하게된 내적동기를 다각도로 해석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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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grams of Theory: Griswold's Cultural Diamond

 

 
우선, 반영론의 관점에서 작품의 제목에는 필연적으로 작품을 붙이는 주체인 작가의 주관성이 개입된다. 작가가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취향'으로 표상되는 체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이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람객의 상상과 주관적 해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 수 있다.

미술작품은 애초에 예술세계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하워드 베커가 예술작품을 예술세계 전체의 산물이라 정의하였듯 대중들에게 보여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인 측면들이 결부되며 작품의 수명을 결정 짓는다. 작가가 작품을 만든 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혼자만 간직한다면 예술세계에서 긴 시간 사랑받는 미술품으로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다. 집합행동으로서 예술의 특성을 고려할 때 관람객이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행위 또한 작품이 만들어지고 감상되는 절차의 일부이다.

예술세계에서는 노동의 분업을 핵심인력과 보조인력으로 구분하는데 상대적으로 보조인력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예술작품에 있어서 1차적 저작권을 지니는 작가만을 핵심인력으로 대우하고는 한다. 하지만 독자가 제목을 붙일 때 비로소 작품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고 한다면 관람객 또한 수동적 위치의 보조인력이라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핵심인력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역할 수행을 인정해주어야만 한다.
    
한편으로는 제목의 생략이 작품이 그려진 시대적 배경에 따라서 작품의 소재를 제목으로 명시 했을 때 행여나 야기될 신변의 위험으로부터 작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 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독재 정권에는 정부의 권한에 반한다 해석될 여지가 있어 작품의 내용이나 의도가 제목적 텍스트로 옮기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형성이론적 접근이 팽배한 사회라면 작품의 제목을 명명할 때조차 암묵적으로 해당 사회에서 판단하기에 바람직한 내용을 담을 것을 강요받기 쉽다.
 
제목을 생략하거나 ‘무제’인 것은 그러한 사회 풍토에 꺾이지 않겠다는 작가의 저항일 수 있다. 또한 작가가 자신이 속한 미술시장의 구조에 따라 은연중에 선호되는 화풍을 따라간다면 제목의 범주도 그 영향력 아래 놓일 확률이 크다.

반면에 작가 본인이 제목의 언어적 속성을 원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가령 추상회화 작가인 클리포드 스틸은 언어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작품이 분리 되기를 바라며, 정도에 관계없이 제목이 수반하게 될 모든 암시성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였다. 이는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므로 텍스트 분석에 있어 언어학의 규칙과 개념을 적용할 것을 주장한 구조주의자들과는 상반된다. 예술의 본질이 문자들 간 관계에서 비롯한 규칙이나 일반적 문법에 있지 않기에 굳이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괜찮다 간주한 것이다. 제목이 없더라도 관람객은 충분히 나름의 감수성에 입각하여 미를 포착할 수 있으며 작품의 가치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때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작품에 이름 붙일 권한을 관람객에게 넘기기도 한다. 파블로 피카소는 작품 제목에 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했다. 그것은 독자의 영역이며 화가는 오로지 한가지 언어인 이미지를 통해서만 소통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화를 소비하고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역할을 강조한 관점과 일치한다. 작품 바깥에서 관람객들이 어떠한 영감이나 메세지를 얻는다면 작품의 존재성이 유의미하게 작품 바깥에서 재정립 되는 셈이다. 그리고 만약 관람객이 작품을 관람하며 제목을 붙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욕구들이 만족된다면 이는 이용과 충족 관점과도 맞닿아있다.
 
문화 연구의 능동적 수용자 개념과 같이 관람객이 시각예술을 향유할 때 적극성을 견지한다면 ‘무제’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많은 의미를 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제목을 붙이는 행위도 결국 작품 감상의 연장선이므로 기대의 영역이라는 지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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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의 유무는 미술작품의 분배체계와 큰 관련이 있어왔다. 18c 이전에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이 발달되지 않았기에 작품 대부분이 성당이나 후원자의 저택에 위치했다. 따라서 작품 제목이 흔하지 않았고 단순히 그곳에 있는 작품이라 일컫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점차 미술시장이 발전하면서 작품을 보관 및 거래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생겨났고 작품 이름에 대한 필요성이 커졌다. 오늘날에는 작가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습관적 관습이 자신의 의도를 망친다 판단할 시에는 제목의 실용적 기능을 잠시 접어두고 있다.

 

"미술계에서 '무제'는 이미 일종의 트렌드가 아닐까?"

 

현실에서는 예술계 내부적으로 인정을 받았거나 작가의 ‘무제’ 경력이 오래됐을 시에는 특유의 전통이라 받아들이며 작품이 난해해서 제목을 붙이기 어려워도 그냥 넘어가고는 한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권위의 영향력에 기대어 반자율적 보상체계의 사회에서 여전히 상당한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위상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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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제목에 정답은 없으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이라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즐기면서 작품에 제목 붙일 권리를 마음껏 누렸으면 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선천적으로 미적 감수성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굳이 스스로가 질적 수준에 따라 서열화하며 지배계급의 문화자본이라 짐작하며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나 시각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하며 미에 대한 감동을 느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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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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