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그때는 몰랐던 이야기

<작은 아씨들>의 아름다운 풍경 뒤에 있던 것들
글 입력 2020.12.2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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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나 홀로 집에>, <폴라 익스프레스>, <크리스마스의 악몽>처럼 매년 성탄절이면 영화 채널에서 틀어주곤 하는 영화들이나, 어렸을 때 읽었던 <작은 아씨들>, <해리 포터> 같은 소설 속 성탄절 아침의 들뜬 분위기 같은 것들이다. 특히 <작은 아씨들>에서, 어머니와 네 자매가 크리스마스 아침 식사를 이웃집에 나눠주러 가는 장면은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비롯해서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부 19세기 영미권의 이야기이고, 나와는 먼 곳의 이야기였지만 마치 내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양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특히 평생 겪어볼 일 없을 무도회 장면이나, 생소한 이름의 음식들로 가득 찬 식사 준비 장면 같은 일상 속의 소소한 모습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상상해 보는 것은 즐거운 놀이였다. <작은 아씨들>의 조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단편적인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세 소설은 내게는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특히 <작은 아씨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냥 설레기만 했다.

 

하지만 스크린 속의 <작은 아씨들>(2019)을 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장면들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아씨들>에서 진짜 이야기는 유년기가 아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네 자매의 미래다. 어린 시절, 네 자매는 각각 연극, 소설, 피아노, 그림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타협하게 된다.

 

연극배우를 꿈꿨던 첫째 메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작가를 꿈꾸는 둘째 조는 여전히 소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뉴욕에서 생활하지만 출판사가 원하는 글과 자신이 쓰고 싶은 글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셋째 베스는 어린 시절 앓았던 병의 여파로 외출도 자주 하지 못하고 집에서만 머무는 신세가 되고, 막내 에이미는 고모할머니를 따라 파리로 떠나 그림을 배우며 꿈꿔왔던 삶을 사는 듯하지만,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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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책을 읽으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가족들을 배려하는 조가 멋져 보였고, 에이미는 그런 조의 기회를 뺏어가는 것 같아 얄밉게 보이기도 했다. 아마 소설 또는 영화를 본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조에게 공감하고, 조를 응원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화된 작은 아씨들을 보며 네 자매 각각의 삶을 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고, 마냥 철부지라고 생각했던 에이미의 삶에 깃든 씁쓸함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미는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떠나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림을 배운다. 하지만 19세기 파리에서 부상하고 있던 인상주의 회화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고, 그녀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이미 구시대적인 스타일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부유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할 생각을 하던 에이미에게 어린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로리가 나타나고, 난데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에이미에게 결혼은, 나아가 당대 여성에게 결혼은 단순히 가정을 꾸리는 일이 아니라 집안에 경제적 보탬이 되기 위한 일이었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에이미는 자신이 사랑하는 로리의 구애에도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 에이미와 로리는 결혼하고, 조 역시도 자신의 소설을 진지하게 읽어주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고모할머니의 유산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고, 네 자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쓴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조는 사랑과 꿈, 모두를 얻었고 메그와 에이미는 조의 학교에서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어느 정도 실현하게 된다. 몸이 약했던 베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나서 왠지 모르게 씁쓸했던 건, 그 해피엔딩은 소설을 위한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조가 쓴 소설의 결말은 결혼이 아니었지만, 독자들은 결혼을 원한다는 출판업자의 말에 결국 결말을 수정하게 된다. 나는 고모할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혼하는 게 너무 완벽한, ‘독자들이 원하는’ 결말이라서 씁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만약 유산을 물려줄 고모할머니가 없었다면,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했다면 조는 행복했을까? 파리에서 로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에이미는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을까? '작은 아씨들'이 겪었을 수없이 많은 ‘만약’이 떠오르고, 반대로 소설 속의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수없는 ‘만약’을 피해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저 결말은 소설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이고, 소설 밖의 ‘조 마치’인 루이자 메이 올컷 역시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깊이 알게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판타지를 마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놓을 수 없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내게 <작은 아씨들>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소파에 폭 파묻혀 두꺼운 소설책을 한 장씩 넘기며 조 마치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환기하는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제는 마치 가의 네 자매가 겪었을 갈등과 고된 삶을 함께 생각하게 된다. 꽝꽝 얼어버린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거나, 인심 좋은 이웃 할아버지에게 피아노 선물을 받거나, 온 가족이 모여 연극을 준비하는 장면보다는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소설을 쓰며 번번이 좌절하고, 천재라 불리는 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가족을 위해 결혼을 결심하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게 될 것 같다.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 나가는 네 자매에 대한 애틋함은 오히려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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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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