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쿠사마 야요이의 삶을 따라가는 77분의 시간 - 쿠사마 야요이 : 무한의 세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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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성차별, 인종차별, 정신질환을 극복하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쫓아온 한 개척자의 이야기다.
- 감독 헤더 렌즈 -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살아있는 현대 미술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경로는 각자 다르겠지만 필자는 작품 [호박]을 통해서 화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본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노란색 호박과 그 안을 빽빽하게 채운 까만 점들. 노란 호박은 풍요를 상징하는 듯 탐스럽게 보였지만 호박 줄을 채운 크기가 다른 까만 점들은 환공포증을 유발하는 듯 기괴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환공포증을 자주 느끼는 편이라 더욱 그랬다.) 풍요로움과 기괴함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한 번에 받은 작품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한동안은 다른 일을 하다가도 문뜩 생각날 정도 였다.
작품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엇보다 그의 인생사가 궁금했다.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이나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그리고 그가 겪어온 삶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이러한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준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 무한의 세계>였다.
쿠사마 야요이는 왜 반복적인 패턴을 사용했을까?
[호박](1994년), 일본 나오시마
쿠사마 야요이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호박]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반복적인 패턴을 집착하듯 자신의 작품 안에 무수히 그렸다. 어떠한 작품에서는 점으로, 그물로, 남근으로도 표현하는데 영화는 그가 반복적인 패턴을 그리게 된 배경을 말해준다.
그 배경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과 경직된 가정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전쟁(제 2차 세계대전(1939-1945)과 일본의 만주 침공(1931)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또한, 억압적인 가정환경 아래 성장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부모님의 불화와 외도를 일삼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불안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특히나, 외도를 일삼는 아버지를 찾는 것은 쿠사마 야요이의 몫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버지의 외도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이 때 받은 큰 충격은 성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그의 작품 중 부드러운 소재로 남근을 표현한 [Arm Chair]와 연관되어 있다.)
[Arm Chair]
세상과 가정의 혼란 그리고 자신의 감정상태를 제대로 표출할 수 없었던 쿠사마 야요이의 내면은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결국, 정신질환을 경험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돌발적인 행동을 보일 때마다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라 판단했고 인정과 칭찬을 주어도 모자를 아이에게 체벌과 억압을 주었다.
그나마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출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탐탁치 않게 여긴 어머니는 그의 그림을 찢어버리기도 일쑤라 몰래 숨어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고 한다. 오히려, 자녀의 정신질환을 방치했고 악화되도록 만든 셈이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사건들은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로 내면의 고통으로 겹쳐지고 겹쳐졌다. 이것은 충격과 공포로 그리고 강박증과 환영을 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로 눈에 남은 잔상들이 자신을 압도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 그는 ‘점이나 그물과 같은 이미지를 보면 자신이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 이미지가 머리에 각인되어 계속해서 생각났다’고 말한다. 심지어 모양이 변형되어 자신의 몸에 달라붙었다고 한다. 자신이 압도될 정도라고 하면 무섭고 두려웠을 만도 한데 그는 그보다 그림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활동으로 표현했기에 두려운 감정보다는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이 보는 환영을 직면하여 그림으로 승화시켰고 이것은 훗날 자신의 독창적인 트레이트 마크가 된다.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 쿠사마 야요이
자신만의 길을 갔던 쿠사마 야요이, 그를 알아보다.
영화를 보며 생각하고 느끼는 관점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쿠사마 야요이가 가진 강점을 보았고 그것에 주목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쿠사마 야요이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불행했던 과거를 벗어나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성격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보았던 것은 그의 진취력과 의지였다. 불행했던 과거로 어두운 내면을 끌어안은 채 살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자 예술로 표현했고 끊임없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일본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예술가로 성공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했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에 매료된 그는 직접 뉴욕 생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편지와 자신의 작품을 보내 도움을 얻었다. 이러한 일화를 통해 그의 진취력과 함께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정진하며 유명 예술가로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 예술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아서도 전례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국에서도 여성 화가로서 쉽지 않았을 길을 타국에서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신의 내면의 우울함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출하고 표현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려 노력했던 모습을 통해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다시금 알게 했다.또 다른 점은 편견 없는 유연한 사고와 독창성이었다. 자신을 어떠한 틀 안에 가두지 않는 사고방식은 그가 표현하는 무한의 세계처럼 자유롭고 유연했다. 특히, 이러한 성격은 그가 뉴욕 생활을 했을 당시에 잘 드러난다. 1950년대 미국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고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였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쿠사마 야요이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표현해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소수의 편에 서서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고자 했다. 동성애자가 당당하게 커밍아웃하기를 바라며 미국 최초 동성애자 결혼식 해프닝으로 사회적 화제를 몰았으며, 누드화 제작 스튜디오, 게이소셜클럽, 거리 전위예술 퍼포먼스 등을 선보였다.
한편, 미국에서 쿠사마 야요이는 자신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표현해낸다. 이 과정에서 엔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유명 남성 화가들은 그의 작품을 표절하고 떳떳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악몽같은 시간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전작을 능가하는 대체 불가능한 작품을 선보이며 결국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확고히 해나갔다.
쿠사마 야요이는 예술은 비싸고 얻기 힘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기도 했다.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팝니다'라는 주제로 '나르시스 정원'을 선보이며 예술을 대중들도 손쉽게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의 예술 작품인 미러볼을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쿠사마 야요이의 기존의 관념과 틀을 깨는 독보적인 행보로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의 끊임없는 열정이다. 그의 인생은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는 미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으면서도 근처에 작업실을 구해 작품 활동을 이어갈 정도로 미술에 끊임없는 애정을 보였다.
자신의 일생 대부분을 미술과 함께 했을 그는 올해 92세로 고령의 나이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중이다. 변함없는 열정과 자신의 기력이 다하는 데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존경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쉽지 않았던 인생이었지만 그럼에도 쿠사마 야요이는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고 말한다. 고통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해내는 삶은 얼마나 대단한가. 자신이 원하던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도 죽음을 생각했던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말은 마음 속 큰 울림을 준다.
자신의 상처를 작품으로 탄생시키며 자신을 위로했던 쿠사마 야요이는 이제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데 활용하고 싶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마음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자신의 작품으로 세상의 위로를 전하는 쿠사마 야요이. 그의 따뜻한 메시지는 추운 겨울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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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Kusama: Infinity -감독 : 헤더 렌즈출연쿠사마 야요이
장르 : 다큐멘터리
등급전체 관람가
상영시간 : 77분
[정윤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쿠사마 야요이가 남긴 말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예술이 고통을 다루는 감각에 대해 생각하면서 멋진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통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예술이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 맞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예술 작품에서 시혜적인 태도나 비윤리적인 태도를 느낄 때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는데 그러한 작품들과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의 차이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빚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 편의 글로 영화는 물론 쿠사마 야요이의 인생과 가치관까지 명료하고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너무나 재밌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로 예술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