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별 준비 [사람]

익숙함에 작별을 고합니다.
글 입력 2020.12.1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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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면 긴, 짧다면 짧은 여덟 학기가 지났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덟 학기와 그 사이에 가졌던 일 년의 휴지기, 합쳐서 다섯 해가 지났다. 논문 제출을 미뤄 졸업은 짧으면 반년 뒤, 길면 일 년 뒤에 하겠지만 그래도 이제 나는 ‘대학생’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대학을 떠날 준비가 안됐다. 여전히 학교를 사랑하고, 계속해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 상상도 못 했던 상황 속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서 그런지 더더욱 떠날 준비가 안 된 느낌이다. 한 학기 내내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고, 자취방이 학교와 멀어져서 학교에는 두세 번 밖에 못 갔다. 계획했던 나름의 일정이 무너졌다. 내가 그렸던 마지막 학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내가 그렸던 마지막을 여기에 글로 불러내 본다. 나는 마지막으로 학교의 모든 공간 위를 다시 걷고, 눈에 담고, 되새기고, 툭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이 넘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싶었다. 정말로 학교를 떠나게 되는 날 펑펑 울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눈이 시리도록 날이 좋았던 낮과 밤에, 질리도록 걸었던 벚꽃과 낙엽의 길 위를 다시 한번 거닐고 싶었고, 어쩌다 눈이 내려 새하얘진 풍경에 발도장을 찍으며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마지막 학기에 학교 구경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올해 작은 오빠와 함께 자취를 시작한 곳은 대중교통을 기준으로 학교와 왕복 3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같은 서울인데, 이렇게 멀 수가 있나. 자취 초기에 향수병을 제대로 앓았다. 배가 고프면 자연스럽게 학교 앞 곧잘 가던 식당의 맛이 혀를 스쳤다. 친구와 무얼 먹을지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매번 갔던 곳을 가곤 했던 기억도 저절로 따라왔다. 한밤중에 배고프다며 서로를 불러내던 친구들의 전화가 당장이라도 울릴 것 같았고, 이제는 새벽에 불러낼 동네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집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줌(Zoom)에 접속해 교수님을 기다리다 보면, 인파에 밀려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못하고 계단으로 뛰어가 강의실에서 숨을 고르던 이전의 순간이 떠올랐다. 연강을 견디기 위해 매점에서 먹을거리를 두둑하게 사서 수업 내내 친구들과 나눠 먹던 날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 노트북 앞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게 더 익숙해졌다. 지친 오후에 학교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반가운 얼굴을 문득 마주치면, 그 찰나의 순간에 나눴던 눈짓과 손짓, 그리고 미소 한 줌. 그 사소한 순간에 들떠서 오르막길도 거뜬히 올랐던 때가 너무나 그립다.

 

카페 마감 시간까지 친구와 자리에 버티고 앉아 준비했던 조별과제. 전공 조별과제 때문에 알바 중 화장실에 틀어박혀 몰래 펑펑 울었던 일. 밤거리를 헤매다가 친구 집 침대를 종착역 삼아 눈을 감았던 어린 날들. 밤새 맥도날드에서 벼락치기를 하다가 맥모닝이라는 크나큰 성취를 이루고, 친구 집에 들어가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나 결국 후회했던 새내기적의 시험기간. 도서관에서, 강의실에서, 세미나실에서 친구들과 과제를 하고 공부를 했던 수많은 새벽들. 공부보다는 먹고 떠드는 시간이 더 길었지만, 함께여서 다가오는 불안을 조금이나마 쫓았던 그 시간들.

 

너무 재미있었던 강의의, 너무 좋아했던 교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기 싫어 한 학기 내내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곤 했는데, 그 교수님은 지금 내 얼굴을 알아보실까. 같이 조별과제를 하며 나름의 동지애를 쌓았던 다른 학우 분들, 혹시 어딘가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까. 좋아하던 학교 후문 카페의 제일 좋아하는 메뉴, 바닐라 라떼에 항상 휘핑을 추가하고 얼음을 적게 담아달라고 요청했던지라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곤 했는데, 아직 나를 기억하실까.

 

어떤 순간이 그렇게 애틋했냐는 질문에, 끝도 없이 답할 수 있다. 떠오르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학교를 떠나기 싫은, 떠날 수 없는 몇 백가지의 핑계를 댈 수 있다. 최근의 나는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이거 기억나?”로 말문을 열어 소위 ‘추억팔이’를 하곤 한다. 그러면 친구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하냐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슬프니까 이제 그만 이야기하라며 눈을 흘기기도 한다. 내가 꺼낸 추억에 더 많은 추억을 꺼내 얹어주는 친구들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져야 하는데, 떠올리고 또 떠올려서 그런지 모든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고 선명하다. 그렇게 기억을 그리고, 또 덧그리다 보면 어느 날의 흔적이 나를 압도할 때까지 있다.

 

이런데 어떻게 내가 학교를 떠날 수 있을까. 깔끔하고 쿨하게 헤어질 자신이 없다. 이게 만약 사람과의 연애였다면, 나는 아마 헤어진 연인에게 새벽마다 전화를 해 시시콜콜한 기억들까지 끄집어내어 매달리는 구질구질한 인간이었을 거다. 몇 마디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배움의 시간, 그 시간과 공간 위에서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 차마 여기에 글로는 쓰지 못할 수많은 흑역사와 우울의 순간까지. 생각만 해도 모조리 아깝고 애틋하다. 헤어질 자신이 없다. 언제부터 이별은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여기에 그대로 머물면 안 되나? 왜 저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걸까.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이 마주하게 될 낯선 것들이 무섭기도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이 마음이 금방 잊히는 거다. 이렇게 좋아했는데 이 마음을 잊으면 어떡하지. 이 마음이 영원한 마음이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그래도 이렇게 글로 남겨놓으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이 사랑을 다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구질구질하고 이기적인 기록인 것 같아 타자를 쳐내려 가기가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다짐이자 준비다. 이토록 떠올릴 거리가 많고,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의 5년은 헛되지 않았다고.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이곳을 떠나도 된다고.

 

이제 익숙함에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몇 주 뒤면 스물다섯이 될 나는, 더 이상 옛날 사진들을 보며 울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로 졸업을 하는 순간, 그게 언제가 됐든 간에 그 어떤 때보다 밝게 웃었으면 좋겠다. 대학에서의 모든 순간이 마냥 아름다웠던 건 아니지만, 그 시간과 공간에 머물던 ‘나’를 기억하는 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 기억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5년이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 애틋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당신들. 내 옆에 머물러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마지막으로 이별을 앞둔 나 자신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지나왔던 나날을 사랑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더 사랑하며. 남아있는 나날을 치열하게 기다리는 나이길 바라. 이제 정말로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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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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