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타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날 [사람]

글 입력 2020.12.1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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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People who need people

Are the luckiest people in the world

 

People(1964) - Barbra Streisand

 

 


어느 늦가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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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는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아마 2~3년 전 늦가을인 것 같아요. 엄마와 길을 걷다가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계획에 없던 갈비탕을 저녁으로 먹은 날이었거든요. 그날 먹은 갈비탕이 따뜻하게 기억에 남은 걸 보면 기온이 낮아지는 10월쯤이지 않을까요.


날짜도 계절도 또렷이 생각나지 않는 그날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건, 맛있었던 갈비탕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는 그날 굉장히 묘한 기분을 느꼈거든요. 세상은 늘 아름다웠지만 유독 평소와는 다르게 더 또렷하게 보이는 기분. 머리 뒤통수 세포 움직임이 세세하게 감지되는 것 같은 기분. 내 인생이라는 소설의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답니다.


그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해줄 것이 있어요. 저는 말이죠,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마다의 생각, 습관, 표정이 있고 순간순간 밖으로 보이는 다양한 모습들이 흥미로워요. 물론 동물의 경우도 비슷한 면에서 관심이 가지만 언어 소통이 어려워서인지 아직은 사람이 더 좋아요.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사람을 구경하고 그 사람의 성격을 혼자 상상하기도 합니다. 가끔 버스 안에서 정류장에 있는 사람 중 누가 이 버스를 탈지 맞춰보기도 하죠. 제가 그런 성격이다 보니 저 같은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집 밖에서는 늘 사람들을 의식하고 긴장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요즘은 이런 예민한 감각이 무뎌져 다행이에요.

 

 

 

타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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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 다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유독 사람에 대한 관심이 진했던 날이었나 봐요. 갈비탕을 먹기 전 삼청동 길을 걷는데 늦가을이라 그런지 버스킹 하는 사람도 있고, 연인과 함께 걷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사람들은 여기 오기 전에 무얼 했을까? 이곳을 지나 어디로 돌아갈까?'


이렇게 구체적으로 내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건 처음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상황의 앞뒤 서사를 아는 건 '나' 하나뿐이잖아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목적, 다른 생각으로 온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느 늦가을 그날부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졌어요. 어쩌면 문화예술로 다듬어진 작품들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캐릭터 설정보다 더 깊은 한 사람의 인생이 묻어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두게 된 날이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던 날을 추억하다 보니 제 경험과 관련해서 두 권의 책이 생각났어요.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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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된 책이에요. 집 근처 도서관에서 꼼짝 않고 4시간 정도 앉아서 다 읽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숙제처럼 읽은 책이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줄 그땐 알지 못했어요. 작가는 도서관이지만 도서가 아닌 사람을 마치 책처럼 빌려 읽는 리빙 라이브러리에서의 경험을 책에 담았어요.

 

 

<리빙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단순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대신 '사람'을 빌린다는 것. 대출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사람들) 목록을 훑어보며 읽고 싶은 책(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마주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이다.


-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中

 

 

사람 책이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었어요. 낯선 표현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단어를 금세 받아들였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느꼈어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30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지 않을까요.


나랑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 다른 경험과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타인의 이야기를 본인에게 직접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꿈꿔왔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고작 4시간을 함께 했던 책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할 만큼 인상적으로 남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글을 쓰다가 문득 궁금해져 찾아보니, 한국에도 현재 사람 책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사람들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날에 꼭 잊지 않고 방문해야겠어요.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일은 늘 어렵지만 사람 책이라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피프티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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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읽은 <피프티 피플>은 제가 궁금한 타인의 이야기를 채워준 뜻깊은 작품이었어요. 사람 책을 빌려보는 건 아니지만 책 속 50명(사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50명이 넘는)의 인물들이 스스로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었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50명의 주인공이 이야기와 닮은 모습으로 저에게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전 '읽고' 있는데 어느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죠. 하나의 캐릭터 설정에서 진행되는 내용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정말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다가왔어요.


바로 앞 인물과 뒤 인물이 연관성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불명확한 호칭의 인물이(감염내과 노교수) 이름을 가지고 잠깐의 주인공으로 등장을 할 때(이호) 이유 모를 쾌감이 느껴졌어요. 앞 인물과 관계있는 사람이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바통을 이어받을 때는 전에 읽은 <붕대 감기>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던 부분은 한 사람만의 입장이 아닌 다양한 사람의 시각에서 인물이 표현되는 것이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인물이 뒤에서는 자신의 줄거리를 가지고 등장하니, 언제 어떤 인물이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한 채 주요 정보를 필기하며 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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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인상적으로 남았던 건 마지막 장의 연출이었어요. 내가 잠깐 머문 공간도 많은 인연이 엮여 있을 수 있다는 것. 각자의 이야기를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특별히 마음에 남았답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숱하게 지나친 인연들, 대화를 나누고 같이 시간을 보낸 인연들, 서로에게 의미를 지닌 인연들 모두가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2020년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는 한 해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마지막 달을 살고 있네요. 올해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눈 시간이 적어서인지 유독 빠르게만 느껴지는 날들이 믿기지 않습니다. 집이 아무리 좋아도 저는 역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사람인가 봐요.

 

영화, 드라마를 보면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잖아요. 보통 사람들처럼 밥을 먹고, 공부하고, 친구들 만나고. 특별하지 않은 생활들도 영상으로 접하면 그럴듯한 개연성을 지닌 채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냥 사람들 이야기인데 말이죠.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의 세상 사람들 이야기도 다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은 모두 현실에 있을 듯하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영화,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개인의 이야기도 나에게는 그저 전해 들은 새로운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현실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는 때로 다른 사람에게 의도에 없던 용기와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듣는 사람의 경험과 만나며 공감이라는 감정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인 것 같아요.

 

스무 날이 지나 새해가 밝으면,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볼 수 있는 날이 돌아오길 바랍니다.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은 서로 도울 수 있으니까요. 2021년에는 꼭 다시 표정으로 만남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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