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미궁 속의 인간 - 눈의 무게

'눈의 무게' 리뷰
글 입력 2020.11.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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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고 있다. 지난 며칠은 예년보다 포근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간 지금은 날이 꽤 쌀쌀하다. 이제 추워질 날밖에 안 남았네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계절은 순서대로 오니까 당분간은 점점 추워지기만 할 것이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추워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 순간 막막하게 느껴졌다.


겨울은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따뜻함은 겨울의 혹독하고 매서운 특성에서 기인한다. <눈의 무게> 발췌문을 읽던 중 "어둠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굶주린 밤이 육식동물 같은 눈송이를 떨어뜨린다."라는 문장에 꽂힌 것은 그 때문이다.

 

'눈송이'가 가진 귀여운 어감과 '굶주린 밤', '육식동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흉포한 느낌의 조합이 겨울의 이중적인 속성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눈의 '무게'라니. 눈이 많이 오지 않는 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는 눈을 무게로 인식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를 단숨에 눈이 무게로 다가오는, 미궁과도 같은 캐나다의 겨울 한복판으로 데려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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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서는 전체를 볼 수 없다


 

소설의 시작은 혼란스럽다. 정보는 짧고 건조한 문체로 전달된다.

 

어느 시골 마을, 아버지를 보러 고향으로 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거의 으스러진 '나'는 마티아스라는 이름의 노인이 있는 오두막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제대로 된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얼마 없는 약을 먹으며 일면식도 없는 노인의 집에 누워 있는 까닭은 전기가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초가을에 전기가 완전히 끊겨버린 이후 마을은 고립되었고 사람들의 생활은 전근대로 돌아갔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자경단을 운영하고 사냥을 하여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게다가 겨울이면 집과 집 사이를 왕래하기도 힘들 정도의 눈이 오는 이 마을에 겨울이 오고 있다.

 

 

옆집 여자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좀 늦어지고 있지만, 데리러 올 겁니다. 꼭 올 겁니다. 내가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요. 그 사람은 알고 있어요.

 

- 40쪽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건 최악의 상황보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가능성'이다. 불명확한 상황에서 상상력은 좋지 않은 쪽으로 힘을 발휘한다. '나'가 느끼는 고통을 이야기하며 시작하는 <눈의 무게>는 무언가를 모른다는 데서 오는 공포를 잘 활용한다.

 

사고 이후 다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마저 오락가락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티아스와 그의 오두막을 방문하는 사람들로부터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초반에 마티아스는 '나'에게나 독자에게나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 '나' 앞에서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옆집 여자가 데리러 올 거라는 말만 반복한다.

 

마을 사람들이라고 무언가 더 나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기는 왜 나갔는지, 이 마을 바깥의 상황은 어떠한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온갖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분명한 건 모두가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조건 없는 호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책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나'에게는 이 마을과 상황 전체가 거대한 미궁처럼 느껴진다.

 

미궁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만 길을 찾아야 한다. 읽다 보면 이 모든 게 '나'의 망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크게 자극적인 요소 없이도 소설을 읽게 만드는 힘은 이렇듯 모든 인물을 계속 의심하게 되는 데서 나온다.

 

 

 

서로를 서로에게 가둔 두 사람


 

 

눈이 오기 전엔, 물 한 모금 삼키려 들지 않더니 이젠 없어서 못 먹는구나. 그야말로 돼지 같은 식욕이야. 네가 고열로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웠던 적도 몇 번 있었지. 하지만 매번 살아나더군. 넌 내 장애물이고, 내 불운이야. 내가 돌아갈 티켓이고.

 

- 61쪽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적어도 '나'의 망상은 아닐 거라는 걸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다음부터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건 '나'와 '마티아스'의 관계이다. '나'에게 마티아스는 생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마티아스의 간호 덕에 다리가 회복되어가지만, 그가 언제 어떻게 돌아설지 예측할 수 없다.

 

마티아스의 입장에서도 '나'는 골칫거리다. 마티아스는 '나'를 돌봐주는 대가로 도시로 향하는 원정대에 한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이다. '나'가 빨리 낫지 않는다면 그들은 마티아스를 놓고 떠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간호를 소홀히 해 그 전에 '나'가 죽는다면 마티아스는 그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도로도 길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이 끝없이 내리는 겨울,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숲 속 외딴집에 고립된 두 사람은 결국에는 서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 살고자 어쩔 수 없이 함께 먹고 자고 서로를 돌본다. 세대도, 살아온 환경도 전혀 다른 둘의 대화는 고장난 시계처럼 드물게 맞는다.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도 타인을 향한 한 줄기 연민은 존재한다. 둘은 서로에게 족쇄이지만 동시에 기회이며 희망이기도 하다.

 

 

조나스가 예견했던 며칠 반짝 풀리는 날씨 같은 건 아직 오지 않았다. 풍경은 침묵과 정적 속에 갇혀 있다. 청우계 바늘은 수평으로 굳어버렸고, 나무들은 눈에 복종하며, 다람쥐들은 그 루터기 속 보금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천장의 물 새는 자리도 평소보다 더 긴 시간 말라붙어 있다. 일단 흐르기 시작하면 늘 전날보다 조금씩 더 속도를 내기는 하지만. 물방울들은 우리의 존재, 냄새, 열기에 감응하는 듯했다. 그것들은 본능적으로 우리를 습격한다. 핏속에 먹이를 찢어 삼키기 전 체계적으로 포위하는 태곳적 기억이 흐르는 큰 육식동물들처럼.

 

- 194쪽

 

 

물론 그들의 관계는 진전될지라도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정전된 시골 마을에서 나는 겨울은 혹독하다. 마티아스와 나 사이의 긴장감은 '나'가 점점 회복되고 마티아스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며 고조된다. 무조건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하던 처지이던 '나'는 점점 제 몫을 하기 시작하지만 이방인인 데다 나이도 많고 쇠약해지기만 하는 마티아스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불안해한다.

 

이 와중에 초겨울에는 그럭저럭 잘 유지되던 마을의 식량 관리와 치안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고, 몇몇 사람들은 어둠을 틈타 식량과 연료를 훔쳐 마을을 떠난다. 희미한 희망은 봄만큼 먼 곳에 있다. 과연 두 사람은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미궁을 탈출한 이카로스를 기다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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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힌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어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카로스는 너무 하늘에 가깝게 나는 바람에 추락하고 만다. <눈의 무게>에는 장이 바뀌는 표제지마다 이카로스와 다이달로스의 이야기가 짧게 실려 있다.

 

보통 이카로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지나친 호기심과 욕심으로 하늘에 가까이 다가간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순간인데, 이 책에 실린 이카로스 이야기에서는 그 추락이라는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보다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가 미궁을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탈출이라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 겨울의 바깥, 마을의 바깥을 갈망하는 '나'와 마티아스의 모습은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탈출을 연상시키고, 더 나아가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 삶의 어떤 속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자신이 희망이라고 믿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겨울을 났어. 이 겨울을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난 가야 돼. 더는 못 기다려. 너도 알잖아. 잘 있어.

 

- 288쪽

 


마을 사람들에게 그것은 전기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연안 마을 또는 도시다. 마티아스에게는 도시의 병원에 홀로 입원해 있는 아내이며 '나'에게는 삼촌과 숙모가 있다고 믿는 숲 속 사냥 오두막이다. 그것들은 한 발 내딛기도 힘든 눈 속에서 겨울을 버티는 그들의 목적지가 되어준다. 이 겨울만 잘 버텨낸다면 그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어느 순간 알고 있다. 그들의 믿음이 합리적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는 것임을. 그 믿음마저 없다면 당장의 겨울을 버티지 못할 것임을.


겨울은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봄이 '나'와 '마티아스'가 진심으로 바라던 것이었을까. 눈이 녹으면 드러나는 건 눈속에 파묻혀서 외면할 수 있었던 현실인지도 모른다. 미궁과도 같은 겨울, 두 남자. <눈의 무게>에서는 누가 이카로스이고 누가 다이달로스인가. 이들이 다이달로스처럼 탈출에 성공해 결국 원하던 자유를 얻어냈을지, 아니면 이카로스처럼 햇볕에 밀랍이 녹아 추락했을지, 그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들은 갇혀 있던 겨울에서 이제 막 탈출했고, 미궁에서 시작한 이 소설은 거기서 마무리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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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무게

 

지은이 

크리스티앙 게-폴리캥

 

옮긴이

홍은주

 

출판사

엘리

 

쪽수

320쪽

 

발행일

2020.11.6

 

가격 

14,500원

 

ISBN 

979-11-969148-7-5 03860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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