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떠나온 이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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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기말고사가 끝났다. 서둘러 자취방을 정리하고, 본가에 한가득 쌓인 짐들을 바라만 봤다. 하필 연말이었고, 온갖 모임에서의 술자리와 송년회를 다니느라 머릿속이 알코올로 꽉 채워졌다. 출발 직전일, 긴 여행을 위한 짐을 다시 챙겼다. 나는 이미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본가로 떠나왔는데, 이번엔 아주 먼 나라로 떠나야 했다.
새벽 다섯 시, 두어 시간을 채 자지 못한 나는 말 그대로 ‘멍’한 상태였다. 비몽사몽 캐리어를 끌고, 목도리를 칭칭 두르던 나에게 까치집이 오십 개는 지은 아빠가 다가왔다. “가자.” 아빠는 늘 졸린 눈을 비비며 나의 비행길에 함께했다. 말없이 캐리어를 옮겨 주었고, 캐리어에 채운 자물쇠가 튼튼한지 꼭 한 번은 확인해야 했고, 평소보다 조심조심 운전해야 했으며, 체크인을 한 후 탑승장에 들어갈 때까지 물끄러미 내 뒷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제주도에 가든 여수에 가든, 부산에 가든, 일본에 가든 늘 한결같이 그래야 했다. ‘아빠 머리 이상해,’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그러면, 멋쩍게 허허 웃기만 했다. 다섯 번째 여행이었다.
여행은 늘 가족, 그도 아니라면 가족처럼 가까운 친구와 함께였다. 이번엔 달랐다. 같은 학교라는 것 빼고는 접점도 없는 다섯 명의 친구들. 나이도, 사는 곳도, 살아온 결도 다른 사람들과 비행기에 올랐다. 어색함을 없애려 애써 농담을 하고 책이나 영화 같은 것들을 들먹이다 잠에 들길 반복했다.
파리. 여기가 파리구나. 그런데 공항은 공사장 같아, 그치.
잠이 덜 깬 우리는 횡설수설 첫 감상을 늘여놓으며 캐리어를 직직 끌었다. 남자 일행들은 흩어졌고, 여자인 우리 셋은 같은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스쳐가는 도로는 비슷했지만 겨울 냄새는 달랐다. 조금 더 퀴퀴한 것도 같고, 눅눅한 것도 같고.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는 것처럼 진득한 것도 같았다.
도착한 지 이틀째가 되어서야 우린 정신을 차렸다. 처음 시차를 겪은 친구는 새벽에 잤다가, 낮에 잤다가, 저녁에 또 잤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잠이 제멋대로 찾아와 힘든 상태였는데, 그날은 꼭 나와야 했다. 2019년의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우린 아직 조금 덜 익은 관계였다. 애써 학교 얘기를 주고받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바빴다.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서 밥을 먹고 나왔는데 낯선 사람이 말을 붙였다. “너 불어 할 줄 알아?”를 영어로 말하던 그는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어제 막 친해진 나의 일행이 내 옷자락 끝을 잡아끌었다. “누나, 가자.” 우린 함께 자리를 떴다.
센 강을 처음 본 우리는 무작정 뛰었다. 미쳤나 봐!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게 추운 날, 이렇게 따듯한 빛들을 볼 수 있다니. 왼쪽 너머엔 에펠탑이 있었고, 맞은편엔 개선문이 내뿜는 빛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파리 사이사이에 우리가 있었다. 개선문에서 카운트다운을 한다는 걸 알아차렸고, 무작정 그 빛을 따라 걸어갔다. 이대로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간다고 해도 가능할 것 같았다. 배가 불러서인지, 어제 만난 나의 일행들이 생각보다 든든하고 좋은 사람이어서인지, 파리의 첫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생긴 용기인지는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집에서 보내는 신년 이벤트를 파리 개선문에서 보내다니. 한 시간 반을 걷고 또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지쳤을 때쯤 카운트가 시작됐다. 우리는 목이 허락한 대로 소리를 질렀다. 정말 행복하겠지, 반가워. 올해는 괜찮겠지? 늘 비는 사람만 있고 들어주는 이는 없는 듯한 소원도 빌었다. 불꽃이 터지는 순간은 아주 느렸지만, 또 쏜살같이 지나갔다. 특유의 화한 냄새와 함께 거리에 있던 이들이 흩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해피 뉴 이어를 외치고, 서로의 축복을 외쳤다. 난생처음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난 한 달 반을 더 타지에 머물렀다. 첫 삼 주는 친구들과 함께 지냈고, 나머지 삼 주는 혼자 여행했다. 태풍이 온 스페인 거리를 우산도 없이 쏘다녔으며, 레스토랑 서버와 친해져 함께 맥주 몇 잔을 마시기도 했다.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며 주책맞게 훌쩍이는 시간, 대낮부터 포르토 와인에 취해 비틀거리며 호텔에 돌아오던 순간까지 모두 내 것이었다. 그렇게 어쩌면 나의 마지막 여행일지 모를 유럽 여행이 끝났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마스크를 써야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김없이 아빠가 김 서린 안경을 쓱쓱 닦으며 실눈을 뜨고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출국장에서 한달음에 달려가 “아빠!” 하면 언제나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로 “딸!” 하며 팔을 벌린다. 무뚝뚝한 부녀 사이에 포옹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우린 왜 떠나왔을까? 왜 술만 마시면, 새벽 세 시만 되면 “여행 가고 싶어 죽겠어.”를 연발하는 걸까. 그저 돈을 펑펑 쓰고 싶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어서? 나의 감정에 따르면, ‘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싶어질 때 여행을 떠난다.
타지에 있으면, 특히 혼자가 되면, 고질적인 외로움과 서먹한 생각들을 떠안게 된다. 한국에 가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엄마랑 영화 보러 가야지. 아빠랑 낚시를 가 보자고 해야지. 몇 년간 안 만났던 친구를 만나야지. 생각의 환기와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 새삼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한참 미리 겪어보는 것. 나는 그래서 여행을 한다.
[이민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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