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전시를 본다는 것

당신은 전시를 왜 보시나요?
글 입력 2020.11.2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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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시 보는 것을 즐긴다.

 

최근에는 팬데믹과 바쁜 일정 때문에 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일민미술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는 최대한 많이, 가능하다면 전부 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전시를 보러 가고, 보고, 보고 돌아오는 과정은 때로는 휴식처럼, 때로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뭔가를 공부하기 위해 전시를 보러 가는 길에는 발걸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전시를 보는 과정은 즐겁고, 내 일상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미술관으로 갈 때 나는 미술관에서 보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간다. 학습을 목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전시에 대한 정보도 잘 찾아보지 않는다. 내게 현대미술 전시를 보는 것은 일종의 이벤트처럼 느껴지고, 그 이벤트에서는 신선함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선함을 쫓는 것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의 종류를 정해놓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낡은 생각이다.

 

미술관에서는 정말 온갖 것을 다 볼 수 있다. 질 좋은 물감이 케이크 아이싱처럼 층층이 쌓인 페인팅, 정갈하게 깎인 나무 조각. 고물상이나 공사장의 풍경에서 뚝 떼어온 듯한 고철 파이프. 어떤 기계의 부품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플라스틱 파편들. 식물, 살아있는 진짜 식물 아니면 누군가 즐겨 입었던 옷.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것들. 현란한 영상이 반복되는 크고 작은 스크린들. 그중 어떤 것은 책에서 본 작품을 닮았고 어떤 것은 졸업전시회에서 본 것을 닮았다. 미술관에는 여러 겹의 시간과 공간이 고여 있다. 아무튼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 내가 보게 될 것들과 그것들이 내게 줄 재미와 만족감에 대해. 그 만족감은 그것들의 생김새로부터 온다.

 

전시를 보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안 봐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걸 굳이 시간을 내서 보러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는 게 재미있다. 다 같이 같은 그림을 보면서 각자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구석을 찾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 시간과 공간이 좀 애틋해진다. 그 애틋함, 그러니까 머리를 써야 한다는 괴로움과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다는 즐거움 사이에서 오는 묘한 쾌감이 전시가 가진 매력이다.

 

미술관에 대한 아주 소중한 기억이 하나 있다. 3년 전 겨울, 언니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기억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세운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이른 아침에 1등으로 미술관에 입장하는 거였다. 우리가 가기로 한 박물관 중에서는 파리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이 그나마 제일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모네가 그린 <수련> 연작으로 꽉 차 있는 원형 전시실이 있는데, 3년 전의 나에게 모네의 수련은 미술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꼭 고요한 상태에서 그 전시실을 만끽하고 싶었다.

 

나만큼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는 언니는 한참을 구시렁거리다 결국 내 제안을 수락했고, 우리는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가서 30분을 걸어서 미술관에 도착했다. 그날 아침의 공기는 아직도 너무 선명하다. 파리의 1월은 한국의 1월보다 훨씬 따뜻했지만 목도리를 해야 할 정도로 쌀쌀했고 가는 길에는 여우비가 왔다. 길은 한산했고, 튈르리 정원에는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하게 나와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여유롭게 나왔지만 혹시라도 우리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다. 겨울이라서 풍경은 건조했고, 비가 와서 하늘은 회색이었는데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저 멀리 사진으로만 봤던 건물이 보이니까 심장이 두근거렸고, 너무 일찍 도착해버린 우리는 미술관 건물 주변을 빙빙 돌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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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본 모네의 수련

 

 

<수련> 연작을 위해 만들어진 타원형의 방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모네의 그림을 실제로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수없이 상상해봤는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였다. 모네라는 화가가 갖는 미술사적인 의미나 작품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색채와 붓이 지나간 자국들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풍경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는 전시실 자체가 주는 분위기에 고양되었던 것 같다.

 

흰 벽과 모네의 그림, 그리고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만 있는 공간에서, 전시실을 천천히 거닐며 그림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특권처럼 느껴지면서 동시에 휴식 같기도 했다. 물론 3년 전의 나는 유럽에 대한 화려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전시를 보는 일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이날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머리를 쓰지 않고, 내가 지금 '전시'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 공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던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시를 보는 일이 이렇게 애틋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전시를 본다.

 

앞으로도 나는 수없이 많은 전시를 볼 것이고, 그중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아주 일부일 것이다. 당장 이번 주 일요일에도 삼청동으로 전시를 보러 간다.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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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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