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의 일기] 평화는 누구의 것인가?

국립현대미술관 <낯선, 전쟁>
글 입력 2020.11.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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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본 기억이 없어 익숙하지 아니하다.”

 

‘낯선’ 전쟁은 그 사전적 의미대로 익숙하지 않은 ‘전쟁’을 뜻할 것이다. 그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세대에게는 낯선=전쟁에 더 가깝다. 또는 ‘익숙한 전쟁’은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는, 개인의 개별성과 주체성이 파괴되고 침해되는 암울하고 끔찍한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선언하듯 ‘낯선’과 ‘전쟁’을 병기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은 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나 강경한 대응 등에 비유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고 간신히 몸을 밀어 넣고 환승 통로를 숨이 차게 뛰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전쟁’을 비유로써 사용했을 때 본래 전쟁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다.

 

‘전쟁’, ‘戰爭’, ‘war’ 이 글자들 속에는 단순히 ‘대립하는 상태’라는 짤막한 표현으로 설명되기에는 수없이 많은 개인과 참혹한 맥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전쟁>에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무관심했던 전쟁, 그리고 전쟁 속의 인간을 탐구한 예술작품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 이면에 숨어 있는 기억과 낯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훼손된 인간의 존엄에 주목한다.

 

- 전시 서문 中

 

 

6월 25일부터 11월 8일까지 진행된 국립현대미술관의 <낯선 전쟁>은 낯선 전쟁의 기억, 전쟁과 함께 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총 4가지 섹션에서 전쟁과 인권, 평화에 대한 작품으로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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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낯선 전쟁>


 

전시 리플릿의 표지에 인쇄된 노순택 작가의 <좋은, 살인> 연작은 전시 보기를 결심하게 했다. 관광지로 보이는 듯한 사진 속 배경의 설명은 이러하다. '성남 서울 비행장에서 개최되는 국제항공 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장이다. 세계의 무기상들이 모여 계약을 체결하며 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한다.'

 

사실 이러한 설명이 없어도 <좋은, 살인> 이미지에서 직관적으로 어딘가 이질적인 맥락을 느낄 수 있다. 날카롭고 차가운 쇳덩이 옆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밥을 먹고, 아이들은 그 위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살인 정말 좋았지, 하고 추억이라도 떠올리게 되는 듯하다.


살인이 유희가 된 맥락들은 우리 주위에 꽤 만연하게 흐르고 있다. 아이들의 유희를 위해 제작된 비비탄 총은 몇 천 원만 지불하면 손쉽게 가질 수 있고, 인터넷에서는 실제 무기의 생김새와 이름을 하고, 복장을 입고, 서로를 사살하는 게임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가상의 공간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그 사이에는 느슨한 인과관계만 존재한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착취와 폭력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되어버린다. 해도 된다, 하면 좋다 등의 미약한 신호로 작용하더라도 이것이 결국에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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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웨이웨이, <여행의 법칙>,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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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타왓 눔벤차폴, <미스터 쉐도우>, 2016-2018

 

 

외에도 인상 깊은 작품들이 많았다. 아이 웨이 웨이의 난민을 상징하는 거대 조형물과 더불어 벽면에는 각종 폭탄의 생김새, 모양, 제조국 아카이브가 배치되어 있다. 공간 속에서 그 공포를 다시금 몸으로 감각하게 한다.

 

논타왓 눔벤차폴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율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사회가 설정한 정의대로 움직이는 사회 맥락을 표현하듯 인간이 지워진 사진 작업을 볼 수 있다. 유희로 소비되는 전쟁 뒤에 어떠한 맥락들이 숨어있는지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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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폭력과 공포가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 중이라고 주장한다.”

 

- 김은실

 


전시장 한쪽에는 자료 아카이브도 배치되어 있었는데, 작은 글씨로 ‘피스모모, 탈북단 평화교육 워크숍’이라고 쓰여 있었다. 공교육 시간에 ‘평화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종종 듣곤 했다. 그때마다 아마 너희는 평화가 뭔지 모를 것이라고, 전쟁의 반대말이 평화의 의미이며 전쟁을 겪지 않고는 절대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과연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가? 전쟁이 없는 이 상황이 분명 평화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지하고 있지 못한 것인가? 기후위기, 인권 침해, 나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이들이 휘두르는 대로 이리저리 멋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은 과연 평화로운가?


폭력은 이미 우리 일상 속에서 벌컥 벌컥 떠오른다. 군대의 위계 문화와 더불어 학교라는 공간이 그러하다. 학교는 이제껏 하나의 질서로 다른 개인의 수많은 질서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잘라내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자행해왔다. 가지치기를 통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을 때 비로소 평화로울 것이라 속이고 주입한다. 이것은 우리 일상 속의 위계에, 성차별에, 학벌주의와 능력 만능주의에 숨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전쟁’의 정의를 새롭게 해볼 필요가 있다. 비유함으로써 본디 의미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확장함으로써 더 다양한 맥락에서 ‘평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정의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 하는 것은 예술일 것이다. <낯선 전쟁>에서 각 작가들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전쟁에 대해 듣고, 우리는 더 넓은 정의로의 확장을 시도해볼 수 있다. 단순히 문제의 배출구로만 작용하지 않고, 단순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낯선 전쟁>을 통해 우리는 또 어떤 자신만의 정의와 관점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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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탈북단 평화교육 워크숍 <평화는 모두의 것>, 2020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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