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는 글쓰기 조기교육을 받았다

어리둥절 굴러온 내 글쓰기의 역사
글 입력 2020.10.2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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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한테 뭔 공부를 시켜? 나중에 미용이나 배우라고 해!” 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엄마에게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기와 반발심이 엄마의 혈관을 타고 이글이글 올라왔다. 반드시 딸을 성공시켜 보이겠다며 내가 유치원생일 때부터 대차게 교육을 시켰다. 영어유치원으로 시작해 사고력 학원을 보내고, 초등학생 때는 인문영재원에 다니게 했다. 위인전 세트와 각종 시리즈 책을 사들여 책장을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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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난의 결과물들

 

 

상을 타야 한다며 봄, 가을이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충청도의 온갖 백일장에 출몰했다.

 

볕이 고요히 퍼져나가는 평온한 날, 깔깔거리며 풀밭을 통통 뛰어다니는 또래들이 얼마나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른다. 그들의 맑은소리를 부러운 눈빛으로 쫓다가 늘 한바탕 혼이 났다. 결국, 꺽꺽거리며 눈물 젖은 김밥을 목구멍으로 진득진득 넘기면서 엄마가 불러주는 글을 써내려 가야 했다.

 

그렇다. 고백하자면, 난 글을 써야겠단 생각을 하기 전부터 글쓰기 조기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엄마는 나를 ‘돈도 못 버는’ 글 쓰는 애로 키울 생각은 결코 없었다고 손사래를 친다. 기본적인 과목인 국어를 잘하면 공부에 도움이 되니까 시켰던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컴활, 체육, 피아노, 영어, 수학, 과학실험 등... 국어와 글쓰기는 일부였을 뿐이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시골에서 미용을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시키는 대로 달달 외우는 공부를 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두 고래의 대결에서 촉발된 기 싸움에 새우는 어리둥절 끌려다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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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하는 걸 정말 좋아했다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학년이 올라가며 학교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공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이 조금씩 생겼고 나는 그 틈을 참 열심히도 달게 사용했다.

 

수없이 소설을 읽으며 키운 상상력으로 다른 세계에 아예 새살림을 꾸려 오가곤 했다. 물려받은 미술 감각으로 열정적으로 낙서를 했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끌려다니던 백일장에서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짜내던 문장들이 쌓여 우습게도 실력이 됐고, 그 실력을 살려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시간이 훌쩍 흘러 대학생이 됐다. 어른인 척하는 아이 말이다. 사교성 없는 아이의 아는 사람 없는 타지 생활은 뻔하다. 늘 혼자인 것. 말할 사람도 없어 서럽고 무료한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글로 표현하는 게 쉬우니까 일기에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 게 없어서, 드러누워서 썼던 일기를 읽고 또 읽었다.

 

보다가 ‘어, 이 표현은 내가 썼지만 좀 멋진데?’ 라며 혼자 보기 아깝다면서 자뻑을 했다. 칭찬에 굶주려 자급자족하던 시기이니 우스운 오만은 양해 바란다. 그렇게 어떤 문장들은 공감을 받고 싶어 블로그에 올렸고 어떤 문장들은 내 품에 끌어안아 어르고 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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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중한 칭찬들을 받았을 때

그 기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데, 사건들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런 것들이 눈덩이처럼 굴러 굴러, 실명으로도 쓸 수 있는 일들과 가슴에만 품을 수 있는 일들이 모이고 모여. 한 명의 지지가 꿈의 받침대가 되고 두 명의 극찬이 날갯짓이 되고, 세 명의 감상평이 가슴을 뛰게 해서.

 

비틀거리는 것인 줄로만 보이던 눈덩이가 어느 날, 여전히 울퉁불퉁하지만 제법 눈사람의 꼴을 갖추어 내 눈을 시리게 비출 때쯤,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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