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그대는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기에. [공연예술]

글 입력 2020.10.18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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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훌쩍 다가왔다. 산책하면 찬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괜스레 감성적으로 변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더욱 따뜻한 공연이 그리워지는 요즘, 마침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광주에서 상연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티켓을 예매하고, 설레는 발걸음으로 공연을 보러 갔다.  적당히 감성적인 ‘힐링극’일 것으로 예상했던 뮤지컬은 생각보다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극의 여운이 짙었기 때문에, 공연을 보고 난 후 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기진맥진해졌다. 심지어 지갑을 객석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공연장 정문까지 걸어와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해보았다. ‘왜 이 공연은 나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그는 세간의 관심을 받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가 야심 차게 발표한 교향곡 1번은 대중의 혹평을 받는다. 심리적인 불안과 더 나은 곡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그를 치료하기 위해 그에게 정신 의학자인 ‘니콜라이 달’ 박사가 방문한다.

 



#1 피아노와 비올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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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소리를 낼 때도 있지만, 거칠고 사나운 연주로 청중을 압도하기도 하는 악기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 해머가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이 소리가 ‘피아노의 비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연주하는 피아노 그 자체였다. 자신의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더 좋은 곡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매달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하고자 방문한 니콜라이 달 박사는 차분하고 유쾌하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와 협주하고 싶어서 비올라를 배웠다면서, 서투른 솜씨로 비올라를 연주한다. 비올라는 첼로보다 높으며 바이올린보다 안정적인 소리를 내는 현악기다. 돋보이지 않고 남을 묵묵히 지지해주는 모습이 달 박사와 닮았다. 서로 연주 방식과 음색이 모두 다른 악기가 만나 연주를 하듯이, 두 인물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2 나는 새로운 곡을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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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와의 정서적 유대를 쌓은 달 박사는 그의 과거를 묻는다. 그가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엄격했던 스승인 ‘쯔베르프 교수’와의 만남과 갈등 과정을 풀어낸다. 쯔베르프 교수는 과할 만큼 라흐마니노프를 억압했고, 둘 사이에 생긴 갈등은 결국 격정적인 멜로디를 통해 서로를 비판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상처를 알게 된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반복적인 ‘자기암시’를 시킨다. “나는 새로운 곡을 쓸 것이고, 새로운 곡을 쓰면 관객들이 나를 사랑해 줄 것이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다. 겨우 똑같은 말을 계속하는 것이 효과가 있나 싶지만,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자신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며,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점차 밝아지는 라흐마니노프를 보면 관객 또한 정서적 교감을 이루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3 트라우마, 잊고 싶었던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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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보였던 ‘자기암시’ 치료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새로운 곡을 선보이기 위해 끙끙 앓으며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근본적인 상처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상처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한번 그의 과거가 펼쳐진다.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 살았던 라흐마니노프. 어머니가 없던 그에게는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누나인 옐레나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했던 누나였고,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대신 맞던 누나였다. 이렇듯 그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았던 누나가 어느 날 병에 걸린다. 그리고, 자신의 치료보다는 동생의 미래를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하는 근본적인 목표는 관객에게 인정받거나 박수갈채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삶의 끝까지 희생적이었던 자신의 누나, 옐레나를 위한 완벽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작곡의 목표였다.

 

그동안 숨겨졌던 과거의 어두움이 밝혀지면서 라흐마니노프의 응축된 감정이 터져 나올 때, 객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지금 나의 눈앞에서 오열하며 울부짖는 한 예술가의 감정에 오롯이 빠져드는 순간이다.

 

 

 

#4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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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상처가 밝혀진 라흐마니노프는 달 박사와의 치료와 대화를 거듭하며 점차 마음의 병을 회복한다. 이 과정을 보는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렸을 때 겪은 상처가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다. 평소에는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지만 두려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덮쳐오면 손이 떨리며 예민해지고 눈물이 흐른다. 나의 감정을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많았다. 사실, 이제는 누구를 탓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 때문에 폭력이 일어났는지 따지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는지, 어린 시절에 아픔을 겪었던 라흐마니노프의 모습을 보니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의 내면이 들춰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아픔을 딛고 일어섰던 라흐마니노프처럼, 나도 트라우마가 있지만 담담하게 인정하고 이겨내려 한다. 달 박사의 말처럼 라흐마니노프는 ‘이미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잘했든, 못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건넨 위로의 말이 관객석에 앉은 나에게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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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에는 꽉 찬 볼거리나 화려한 무대장치는 없다. 그러나 두 배우의 연기와 노래, 피아노, 그리고 현악 4중주가 극을 다채롭게 구성한다. 드라마의 구성 또한 탄탄하며, 음악과 연기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관객의 집중을 이끌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재밌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삶의 목표가 흐릿했던 이들, 삶이 지치고 힘든 이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이 공연을 통해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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