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이 분명하답니다 – 기꺼이 사랑하는 이들의 기록: 환상통 [도서]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들만의 이야기
글 입력 2020.09.1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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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주제가 있다. 나와 어느 타인의 삶을 관통하는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세상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쓰이고 있는 사랑 말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이라고 적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외로운 감정은 바로 연예인과 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행태에 관한 것이다. 팬덤이 대중문화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를 메꾸는 연기 같이 자욱한 마음의 집합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밖에 없다. 세상 밖에는 그들을 조롱하는 단어가 만연하고, 그들의 사랑은 한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만이 기록할 수 있는 아주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사실 미리 말하자면 자신이 없다. 오랫동안 쓰고 싶었다고 말했던 것은 쓰고는 싶었으나, 그것을 분명한 단어로 치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마음만큼은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대체 어떤 언어가, 어떤 단어가 이 관계를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나의 고민을 해결해줄 재밌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이희주 작가의 <환상통>이다.

 

 

환상통.jpg

 

 

<환상통> 속에는 아이돌 가수의 팬인 m과 만옥, 그리고 만옥을 짝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대화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보고 조금은 이해하고, 어쩌면 (꼭 연예인을 향한 것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기다림 가득한 사랑을 되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m은 말한다. '나는 그들로 인해 기록하는 것이 나의, 아니 망각하는 모든 인간이 해야 할 저항이라는 걸 알았고, 설령 망각에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의무라는 걸 알았거든요. 또 복잡한 세상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한철과 그 시절 팬의 일상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는 것도요.'


m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 M을 보며 경험하는 모든 사건과 감정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처럼 누구의 관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사랑하는 것의 실재를 믿기 위해서였다.

 

 

'거리가 멀거나 혹은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았기에 눈앞의 실재는 언제나 잔상에 불과했다. 선명하지 않은, 인내심이 없는 이미지였다. (중략) 매번 그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내가 보았다고 믿었던 것이 정말 실재인지, 아니면 사진으로 본 M의 이미지에 기반한 모습인지는 알 턱이 없었다.'

 

 

m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기록함으로써 미련 없이 사랑하고, 떠나보내기를 원했다. 비록 그것이 늘 마주치는 사랑일 수 없어 때로는 의심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한편 만옥이라는 인물은 m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조금 더 열렬하고, 적극적으로 '순간'에 몸을 던진다. 그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한다. 그래서 때로는 괴롭기도 하다. 이것에 대해 m은 이렇게 말했다. 'M이 자주 밉고, M을 생각할 때면 고통스럽고, 가끔은 M을 증오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한 것은 M을 향한 사랑이었다.'

 

만옥은 M을 만나기 위해 길 위에서 하염없이 M을 기다린다. 김밥 따위를 먹으며 M이 행사장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폭발하는 질투심으로 분노하기도 한다. 만옥은 이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상황을 겪고서도 M의 찬란한 순간을 M의 손에 쥐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진창을 건너면서도 M과 가까워지거나 긴 대화를 나눌 수 없고, 그렇기에 M의 생각과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없고, 그로 인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상처 받게 될 것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다는 허상 같은 불안을 견딜 수밖에 없지만, 만옥은 이렇게 생각한다.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으며 나는 아름다운 것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만옥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M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고, 그와 자기자신을 위해서라도 가장 뜨거울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서 팬석을 쭉 훑어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어요. 내 주변 열 명은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나랑 마주친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열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만옥을 짝사랑하는 남자다. 그는 만나기조차 어려운 아이돌 가수 M을 사랑하는 만옥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만옥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고자 m을 찾아가 그들이 했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만옥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그도 만옥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만옥이 했던 말을 회상한다.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그러나 내가 너의 병이 된 적은 없었다. 너의 병이 나만은 비껴갔다. 나는 이것이 두고두고 서운했다.'

 

다 '같은'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관계와 상황에 따라 우리들은 모두 저마다의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고, 주관적인 판단을 통해 그 감정을 이름 짓는다. 따라서 우정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되고, 증오가 누군가에게는 애틋함이 된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주관적 감정들이 타인에 의해 쉽게 훼손되기도 한다. '그거 사랑 아니야.'라고 꾸짖는 순간, 분노와 함께 작은 의심이 피어오른다. 그렇게 숨겨지는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 이 책의 내용이 반갑고, 또 인상적이었다.

 

m과 만옥의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적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기다림을 사랑이라고 믿고, 타인의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깊이 빠지고, 충분히 누릴 수 있음에 기뻐 눈물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은 그렇게 탄생하는 이야기와 감정을 누구보다 아끼고,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닦아 나간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사랑이라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가치 있다는 것이 다만 빛날 뿐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m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하는 것이 삶이라지만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는 많은 것들이 제 형체를 잃곤 한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거나, 전혀 다른 사물이 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된다. 내가 바라보는 그것 역시 본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 형태가 재구성된다.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누구에게도 빌려줄 수 없는 자신만의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넘치는 이 희한한 감정을 정말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모든, 사랑에 관한 외면되어왔던 이야기를 기록하고, 추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런 비논리적이고, 어딘가에서 자랑스레 꺼내어 보이기엔 조금은 꺼려지는, 그러나 누구보다 아끼고 애틋한 사랑의 경험을 해본 사람일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고작 '빠순이'로 불리었던 사람들이 '기꺼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맹목적이고, 때로는 자기 파괴적인,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점철된 기묘한 사랑의 한 종류를 <환상통> 속 m과 만옥의 기록을 통해 들여다 보고, 나는 세상에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보내는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되물음을 통해 사랑에 너그러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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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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